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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필연 혹은 우연

by 홍차영차 2019. 9. 20.

필연 혹은 우연

<에티카> 1부 정리 16 ~ 36





운명인가 은혜인가

내가 대학교를 졸업한 것은 IMF가 터지고 난 직후였고, 어디에도 취직할 곳이 없어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것도 개교 이래 처음으로 본과 학생이 대학원 입학에 떨어지는 초유의 기록을 세우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학교 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예상되듯이, 나에게 배정된 지도교수는 이제 갓 교수가 된 초짜였고, 그 교수의 전공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아무도 가고 싶어하지 않은 뿐더러 인기라곤 1도 없었다. 대학원 1학기를 지날 때만 해도 우울한 나날이었다. 어떻게 본 대학원에서 떨어질 수 있는건지 알 수 없었고, 전혀 관심도 없는 세부 전공에 공부도 하기 싫었다. 그런데, 우울했던 대학원의 나날과는 상관없이 대학원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는 시점에, 내가 공부한 전공은 최첨단의, 인기 최고를 구가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아무런 시험도 보지 않고 너무나 쉽게 취업할 수 있었다. 이게 뭐지? 운명인가 아니면 은혜인가?

20대의 7~8년의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여기에서도 숙명적인, 우연적인 요소들이 너무나도 많이 나타난다. 왜 하필 내가 졸업할 때 IMF가 터졌을까? 수십년의 기계공학과 역사속에서 어떻게 내가 대학원을 떨어졌을까? 어떻게 나의 전공이 이렇게 짧은 기간내에 갑자기 중요해졌을까? 아, 이건 모두 신이 나를 위해 설계해놓은 운명이구나!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일반인들(vulgus)이 삶을 대하는 태도이다. 자신에게 이롭지 못한 일에는 순간 순간 정념적으로 절망하고, 또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에 정념적으로 기뻐하는 모습.




필연 싫어, 우연 좋아

나에게 우연적으로 보였던 사건들이 정말 우연이었을까? IMF, 대학원 불합격, 인기를 얻게 된 세부전공이 내 눈에는 우연적으로 보이지만, 우리들은 이것들이 분명한 인과성의 결과임을 안다. 스피노자가 자주 언급하듯이 누구라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러한 것들이 일어난 이유를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자신의 욕망과 일어난 결과’는 인식하지만 그것들이 일어난 원인들, 자신이 그러한 욕망을 갖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꿈에서도 생각지 않는다. 바로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우연적 결과에 기뻐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한다.


자연 안에는 우연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에티카>, 1부 정리 29)


왜 우리는 ‘일정한 방식으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규정’되는 것을 싫어할까? 필연성이라는 말에, 결정론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거의 본능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느낌, 억압받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 의지의 자유를 가지고 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다는 생각! 근대인이라면, 아니 자아라고 하는 독립된 주체를 가졌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에티카>를 시작하자마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자유와 다른 ‘자유’를 정의한다. 

스피노자의 정의에 따르면 자유란 자기 마음대로, 자연의 질서를 벗어난 초월적 의지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 행하는’(1부 정의7) 것이다. 왜냐하면 의지란 사유 양태를 넘어서는 특별한 것이 아니며 오직 사유의 한 양태로서, 다른 사유 양태처럼 인과적 질서 속에 위치하는 필연적 원인이기 때문이다.(1부 정리 32)

스피노자가 언급하는 필연은 모든 것이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숙명론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 행동, 생각들이 결코 우연히 생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특히, 그는 필연성을 이야기하면서 신의 본성, 주어진 본성을 강조한다. 진정 자유로운 순간은 전후맥락을 무시하면서 자신의 의지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과 사물의 본성, 그리고 신의 본성을 파악하고 행동하고 사유할 때이다.




필연성 = 운명애

오랜 시간 시험 공부를 열심히 했으니 필연적으로 나는 합격해야 한다거나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했으니 다른 사람들도 필연적으로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럴 때는 강력하게 필연성을 옹호하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에서 우리는 우연에 희망을 건다. 시험 공부를 하지 않았음에도 내가 찍은 번호가 정답이기를 바라고, 분명 열심히 물을 대고 풀을 뽑지 않았으면서도 우연히 많은 곡물이 생기기를 바란다. 우연에 대한 긍정은 오로지 이런 방식으로만 일어난다. 우연으로 밭에서 보물을 캐낼지도 모른다거나, 우연스럽게 로또에 당첨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방식.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필연과 우연을 대하는 태도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유라고 부르는 자유의지에서 나는 무엇을 기대하고 있으며, “이번 일은 우연일 거야. 다음 번에는 잘 해결될 거야!”라고 말하면서 나는 무엇을 회피하고 있는 것인지 확인해야 한다. 사실 나에게 스피노자의 필연성, 결정론은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너 자신을 알라!”의 17세기 버전으로 보인다. 자신의 본성에 대한 탐구, 어떤 사건/사실을 직면하는 힘을 기르자는 것! 내가 나의 본성과 사물의 본성을 알고 있다면 그것 아닌 다른 행동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주어진 본성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따라나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실존하지 않는다. (1부 정리 36)



2019. 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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