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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정념에 대하여

by 홍차영차 2017. 7. 9.

정념에 관하여


인간은 필연적으로 다양한 감정에 의해 좌우된다. 인간의 감정은 불행한 사람에게는 동정을 표하고 부유한 사람은 시기하며, 자비를 베풀기보다는 복수를 선호하는 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승리한 사람은 자신을 이롭게 했다는 사실보다는 남을 해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더 자랑스러워한다. (<정치론>, 1-5)


어떤 괴팍한(?) 사람도 친구가 되면 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생활하다보면 그가 그렇게 반응하는 이유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 언어로 표현하자면 어떤 사건의 ‘인과 관계’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를 읽고나서야 스피노자의 근원적 문제제기가 보였다.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 <에티카>, <정치론>에 걸쳐서 지속해서 붙들고 있는 것은 정념의 문제였다. 스피노자는 인간들의 행동과 생각을 관찰하면서 인간을 정념적 존재로 정의했다. 인간은 이성적으로 생각한다기보다는 본성 자체가 복수, 시기, 질투에 좌우된다.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표현한다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인간은 흔들린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가 어울리지 않을까.

스피노자는 이런 문제제기의 끝판으로 <정치론>에서 정치체제에 대한 구체적이고 현실들을 고민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고민은 그의 죽음으로 군주정과 귀족정을 거쳐 민주정에서 멈춘다. <정치론>은 민주정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시점인 11장에서 멈췄다. 발리바르는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 민주정에 대한 구체적 묘사 없이 미완으로 끝낸 이유로 민주주의의 내재적 모순을 들었다. “대중들은 공포를 느끼지 않으면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다.” 발리바르가 보기에 스피노자는 대중들이 보여주는 ‘공포에 대한 양가성’ 때문에 <정치론>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실현 방안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었다.

스피노자는 ‘전적으로 절대적인 통치(absolute absolutum imperium)’로 민주주의를 말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정치적 사회화의 가장 완전한 형태이며 집단적 덕의 소산이자 형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절대적인 통치에서 대중이 스스로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발리바르의 지적 역시 정념적 집합체로서 대중이었다.

미신에 흔들리고, 공포에 두려워하는 ‘정념적 존재’인 인간들이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무엇보다 정념이 무엇인지 그리고 정념의 존재인 인간의 행동이 자유로울 수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념은 수동적이다

스피노자는 <에티카>를 1부 ‘신에 관하여’로 시작한다. 윤리학은 사람이 다른 개체와 맺는 관계 속에서 고려해야 할 일종의 규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스피노자는 그 출발점을 ‘신’으로 잡았다. 왜냐하면 세계는 유일 실체로서 신을 증명하고 있고, 인간이란 실체의 변용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을 유일 실체의 변용으로 파악해야 관계 속에서 배치되어 있는 인간 관계의 규칙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체란 ‘그 자체에 의하여 파악되는 것으로 자신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서 다른 개념이 필요치 않은 존재’이다. 결국 스피노자에게 신이란 자기 원인을 스스로 갖고 있는 존재로, 세계 그 자체가 된다. 신은 곧 자연이 되고,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신의 변용된 모습으로 세계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자연에는 자연이 움직이는 법칙이 있다. 자연 속의 어떤 존재 혹은 물질도 그 법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 정서란 단순하게 인간 신체의 반응일 뿐이고 이 역시 자연법칙에 예외일 수 없다. 즉 정서란 외부 자극에 수동적으로 발생하는 것이고, 스피노자는 이를 정념으로 부른다. 사람들은 똑같은 날씨에도 기분이 나쁘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같은 사람을 만났을 때에도 상황에 따라 매우 다른 정념이 발생한다.



그런데 마음의 동요는 신체적 반응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주변의’ 다른 신체들과 맺고 있는 외적 관계들에 의해서도 설명된다. 스피노자의 분석에 따르면 자기 자신을 보존하고 지속시키려는 경향을 지닌 인간들은 유사한 것 사이에서 지각하는 상이함에 대한 사랑과 증오를 결부시킨다. 이러한 정서적 동일시에 대한 분석 원리는 의심의 여지 없이 질투에 대한 정의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될 때 더 큰 질투와 증오를 느낀다. 인간에게는 “그 어떤 것도 우연히 희망 또는 공포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사랑하는 것이 자기 혼자 이것을 소유했을 때와 같은 또는 더 긴밀한 우정의 끈으로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상상한다면, 그는 사랑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증오로 변용될 것이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질투를 느낄 것이다. (3부 정리35 및 주석)


자유로운 인간 되기

스피노자에게 인간이 정념적 존재라는 것은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는 유한양태인 인간의 특성이다. 그런데 21세기 인간들은 간단히 요약하자면 ‘기분지상주의’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예전부터 인간은 정념적이었겠지만 정념적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특히 근대에서는 인간이 가진 욕망과 감정은 철저히 배제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현대의 사람들은 정념적인 자신의 상태를 문제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기분(정서) 상태에 따라 금방 연애를 시작하고, 또한 기분이 나빠지만 금방 헤어진다. 사회 생활 역시 마찬가지다. 기분따라 시작하고 그만둔다.

정념에 따라서 행동하고 결정하는 인간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문제는 이렇게 마음의 동요에 따라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신을 사람들은 매우 자유로운 인간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어떤 사건의 인과 관계를 보려고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감정에 휩쓸린다. 스피노자는 이를 예속이라고 표현하지만 사람들은 주체적 의지에 따라 자유로운 행동을 한다고 여긴다. 대중 속의 한 인간뿐만 아니라 정념적 인간들로 구성된 대중들의 행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유한 양태로서 자기 원인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그 사건에 무한히 연결되어 있는 인과 관계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분석을 따라가 보면 세계는 유일 실체인 신 즉 자연이다. 신이 유일 실체라는 말은 자신 안에 자기 원인이 있다는 말이고, 이 말은 스스로가 어떻게, 왜 존재하는지 그 인과 관계를 알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자연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유한 양태인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스스로가 왜 태어났는지, 어째서 이 나라, 이 부모에게서 태어났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존재론적으로도 ‘혼란한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가 볼 때 사람들은 인간을 마치 ‘실체’인 것처럼 생각한다. 자신이 어떤 사건의 인관 관계를 모두 알 수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사물, 사건, 인간의 한 단면일 뿐이다. 신 즉 자연의 세계 속에서 어떤 관계 안에 배치되어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스피노자에게 자유로운 인간은 정념에 휩싸인 존재가 아니다. 유일 실체로서 신을 발견하는 것이고, 그 속에서 자신을 파악해야 한다. 인간은 자연의 법칙, 그 필연성 속에 있을 때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


2017. 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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