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책을 새롭게 읽는 행위
나는 이제 신이 인간에게 계시하는 방법과 수단으로 넘어가 상세히 다루고자 한다. … 이 주제에 대한 결론은 오직 성서에서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리고 오늘날 어떤 예언자도 살아있지 않기 때문에 성서에서의 예언자의 언급을 독해하는 것으로 출발점을 삼는 방법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 오직 성서 안에서 예언이나 계시였다고 명시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나 또는 다른 해석의 여지 없이 맥락상 오지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것만을 우리는 예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신학정치론>
1670년 <신학정치론>은 오랫동안 준비하고 쓰고 있던 <에티카> 저작을 멈추고 썼던 대담한 책이다. <리바이어던>을 썼던 홉스조차도 이 책에 대해 “나보다 막대기를 멀리 던졌다. 왜냐하면 나는 감히 그렇게까지 대담하게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가 이렇게 대담한 책을 분노에 차서 썼던 다른 이유는 암스테르담 그룹의 친구였던 아드리안 쿠르바흐의 죽음때문이다. 1668년 쿠르바흐는 종교비판적인 책으로 썼다는 이유로 수감되었는데, 이후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되어 1669년 형을 받을지 9개월만에 죽고 말았다.
스피노자에게 이 일은 이중의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친구를 잃었을 뿐 아니라 대중들이 자유와 관용을 따르기보다는 예속을 더 좋은 것으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은 종교와 국가의 위험한 결탁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 때 스피노자가 했던 것이 바로 책을 읽는 행위였다. 혁명이 필요한 시기에 스피노자는 ‘성경’를 읽었다. 꼼꼼히 아마도 몇 번이나 반복하면서 그는 성경을 읽어나갔을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가 이미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이야기했듯이 ‘읽고 쓰는 것’이야말로 혁명적 행위이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서 95개조 반박문을 쓰면서 시작된 종교개혁의 시작 역시 다시 읽기였다. 바로 이 시기에 루터는 라틴어로 되어 있던 성경를 독일어로 번역했고, 그 이유 역시 성경을 스스로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삶의 한 부분도 흔들리지 않는 지금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신학정치론>를 묘사했던 말들과 출판이후 1671년에 금서가 되었던 것을 보면 ‘새롭게 읽기’야 말로 혁명적 행위임을 알 수 있다.
스피노자 역시 자신의 책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이나 그들과 유사한 태도를 지닌 사람들에게는 이 책을 읽을 것을 권하지 않는다.”고, 또한 “책을 읽고 익숙한 습관대로 잘못 해석하느니, 차라리 이 책을 완전히 무시하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대중들은 ‘익숙한 습관대로’ 읽게 될까 그리고 읽어도, 읽어도 삶의 아무런 변화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에티카>에서도 말했지만 <신학정치론>에서도 스피노자는 일관되게 말한다. 정념에 휘둘리기 때문에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새롭게 읽기’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익(기득권)을 침해하기 때문이 아닐까. 곰곰히 생각해보자. 내가 읽고 있는 책이 읽히지 않는 것이 단순히 어렵기 때문일까. 자신이 이득라고 생각하는 것을 무너뜨린다는 것을 심신평행론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 아닐까. 새롭게 ‘읽고 쓰기’는 여전히 ‘혁명적 행위’이다!
2017.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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