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자연학과 신체의 발견
-<에티카> 2부 '자연학 소론'을 중심으로 -
지난해 글쓰기강학원에서 썼던 에세이는 ‘스피노자 정치학과 문탁의 의사결정’에 관한 것이었다. 이 에세이를 쓰면서 나는 스피노자의 정치학이 이론을 만들기 위한 시도가 아니라 복합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현실적인 인간들을 대상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스피노자는 인간을 이성적이고 합리적 판단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툭하면 감정에 휘둘리면서 일을 그르칠 수 있는 정념적 존재로 정의한다. 그렇기 때문에 스피노자의 정치학에서 핵심은 ‘정념들의 역학’을 잘 아는 것이다. 바로 여기가 스피노자의 인간학, 정치학의 출발점이다.
그런데 지난 에세이의 논의들은 정념적 존재로서 인간이 어떻게 발생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채 진행되었다. 인간이 정념적 존재에서 벗어나는 것은 공통개념의 형성에 있고, 공통개념의 형성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일 때 가능하다고 했다. 여기에 간극이 있다. 인간이 정념적 존재라는 사실을 그냥 받아들인다고 해서 공통개념이 형성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냥 모여서 책을 읽고 활동 한다고 공통개념이 형성되는 것도 아니다. 공통개념은 관념의 합성이면서 신체의 합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정념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신체와 연결시킬 수 있을 때, 공통개념을 형성하는 활동과 공부를 좀 더 잘 조직할 수 있을 것이다.
1. 신체와 관념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기위해서는 최소한의 공통 개념이 필요하다. 서로 말이 통해야, 뭔가 일치하는 것이 있어야 함께 살지 않겠는가? 그런데 공통개념이 관념의 합성이자 신체의 합성이라고 말하면서 왜 관념이 아니라 신체에 더 집중해야할까? 니체는 왜 사람들은 의식 앞에서 놀라지만, “놀라운 것은 오히려 신체”라고 말했을까?
흔히 우리는 정신이 신체를 지배한다는, 그래서 강한 의지(정신력)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데카르트의 이분법에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신체를 무력한 대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실로 아직까지 누구도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규정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누구도 신체의 모든 기능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신체의 구조를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체와 정신이라는 이분법 혹은 정신이 신체를 지배한다는 통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신이 아니라 신체를 다시 발견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정념적 존재라는 사실은 신체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게 인간 정신의 대상은 신체이고, 정신이란 신체변용을 통해서만 외부 대상을 인식한다. 왜냐하면 관념이란 외부 자극에 의한 신체의 변용으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인식이란 일종의 관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관념이란 외부 자극을 통해 신체에 남겨진 흔적-이미지와 다름이 없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정신을 형성하는 관념의 출발 부분이다. 하지만 평행론에 따르면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은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다. 다시 말해 사물들의 질서와 연관과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은 동일한 인과적 질서와 연관을 갖는다는 의미다. 신체의 흔적과 관념은 서로 대응하는 하나의 동일한 실재의 두 측면이지 정신이 신체를 지배한다거나 신체가 정신을 지배함을 뜻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여러 감정, 예를 들면 사랑, 미움, 질투, 명예심, 동정심을 인간 본성 자체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는데, 이런 여러 정념들은 신체에 남겨진 흔적-이미지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정념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떤 사건을 볼 때 그 인과관계를 보지 못하면서 정신에 떠오르는 이런 절단된 이미지들을 가지고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정신은 왜 절단된 이미지로밖에 떠올리지 못하는가?
2. 17세기 자연학과 스피노자
정념적 인간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보려면 신체의 구조를 봐야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피노자가 신체를 어떻게 파악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스피노자는 처음부터 신과 인간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존재를 일의적으로 설명했다. 여기서 일의적이라는 말은 신을 존재케하는 원리와 인간이 존재하는 원리가 다르지 않을 뿐더러 인간과 자연 속의 다른 물체들이 존재하는 원리도 같다는 말이다. 이제 인간 신체를 잘 파악한다는 것은 스피노자가 바라보는 물체들의 법칙, 자연학을 이해하는 것으로 치환된다.
르네 데카르트(1596~1650)
스피노자는 근대의 철학자이면서도 반근대의 철학자로 불린다. 왜냐하면 그는 17세기 케플러, 갈릴레오, 데카르트, 뉴턴으로 이어지는 기계론적 세계관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철학 체계에는 그 어떤 초월성, 목적성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분명 자연에 대한 기하학적 인식이라는 기획에서 출발했지만, 신과 인간을 자신의 기획에서 제외시킴으로써 ‘국가 속의 국가’를 건설했고, 이로써 신과 인간, 인간과 자연은 위계를 가지면서 나눠지게 되었다. 반면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신 앞에서 놓아버린 기하학적 원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서 근대적 체계에 반근대적 요소를 갖게 되었다.<에티카>의 부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스피노자는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신과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것을 설명하기를 시도했다.
갈릴레이 갈릴레오 (1564~1642)
자연학의 관점에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개념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데카르트(1596~1650)는 동시대인으로서 근대 과학혁명을 일으킨 갈릴레이(1564~1642)와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갈릴레이가 이룩한 자연학의 핵심은 운동의 상대성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개념을 폐기하고, 새로운 운동학을 도입했다. 17세기 이전까지 자연학의 기본개념을 제공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과 정지 사이에 본성적인 차이를 전제했다. 그는 우주 안에 존재하는 각각의 사물에게 고유한 자리를 배정해주는 우주적 질서가 있다고 생각했다. 우주적 질서 안에서 모든 존재는 두 종류로 나눠지는데, 불과 가벼운 것들은 위로 흙과 무게를 가진 것들은 아래로 돌아가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자연적 운동”이란 자신의 고유한 자리로 되돌아가려는 사물의 운동이고, “격렬한 운동” 혹은 “강제된 운동”은 고유한 자리로 돌아가려는 경향에 거슬러 일어나는 운동이다. 반면 갈릴레오는 운동을 물체의 본성과 연관된 문제가 아니라 사물들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라고 재정의한다. 따라서 고립되어 있는 물체의 운동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운동이란 항상 둘 이상의 물체들 사이에서만 인식될 수 있다. 자동차 속에 있는 컵은 나아게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지만, 차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는 빠른 속도로 운동하는 컵으로 보인다. 동일한 물체라 하더라도 어떤 물체들과 관련해서는 정지 상태에 있을 수 있으며, 또 다른 물체들과 관련해서는 운동 상태에 있을 수 있다.
데카르트 역시 상대적 운동개념을 받아들였고, 모든 물체는 역학원리에 따라 작동한다는 기계론을 펼쳤다. 하지만, 그는 ‘자연’으로부터 모든 내재적 운동력을 박탈함으로써 ‘자연’을 평가절하했다. 데카르트의 세계에서 물체가 운동하기 위해서는 강한 외부 원인(신)이 필요하게 된다. 데카르트로부터 갈라지면서 보여주는 스피노자 철학의 독창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데카르트와 달리 스피노자는 연장(extension)을 신의 속성 중 하나로 제시했다. 연장이 신의 속성으로 정의되면 연장을 가진 모든 유한 양태들은 신의 역량은 분유하게 된다.
3. 복합물체로서의 신체
스피노자는 17세기의 기계론적 질서와 상대성 운동원리를 받아들였지만, 물질의 본성을 추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학으로 복귀하지 않았다. 그는 물체들이 맺고 있는 외재적인 인과관계 속에서 운동을 논증한다. 이런 이유로 스피노자의 체계에는 신, 인간, 자연을 위계화하는 어떤 개념도 필요치 않다. <에티카> 2부 정리 13과 14 사이에 있는 ‘자연학 소론’은 이런 관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자연학 소론의 출발은 물체들에 관련된 공리, 보조정리로 출발하여, 복합물체로서의 신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6개의 요청으로 끝맺고 있다.
스피노자 자연학에서 개체는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운동하고 있는 물체들의 연합’이다. 갈릴레오의 상대성 운동과 마찬가지로 스피노자에게 “모든 물체는 운동하든가 정지”해 있는 것이고, “각각의 물체는 때로는 더 느리게, 때로는 더 빠르게 운동”하고 있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는 원자처럼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고, 다른 개체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신체에 대해서도 물체들에게 적용했던 동일한 운동 법칙을 적용한다.
스피노자는 하나의 신체를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한다. 첫째, 신체는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무한히 많은 부분들을 포함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이다. 한 신체는 무한히 많은 부분들 사이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 일정하게 규정된 어떤 관계에 따라 존재한다. 하나의 신체는 자신을 구성하는 무한히 많은 부분들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을 둘러싼 무한한 많은 다른 개체들과의 복잡한 관계로서 자신의 개체성을 드러낸다.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우리는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고, 합성하고 분해되는 과정 속에서 존재한다.
둘째, 신체는 다른 신체들을 변용시키고 다른 신체들에 의해 변용된다. 인간이 개체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을 규정하는 일정한 관계로서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는 한에서 변용하고 변용시킬 수 있는 한에서이다. 한 신체를 그 개체성 속에서 규정하는 것은 이 변용시키고 변용하는 능력에 다름 없다.
4. 신체 구조와 변용
‘무한히 많은 작은 부분들’로 구성되는 신체가 외부의 대상에 의해 자극받을 때 일어나는 모든 변용을 파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변용은 신체(의 무수히 많은 부분들)와 대상(의 무수히 많은 부분들) 상호간에 일어날 뿐만 아니라 신체 내부의 무수히 많은 부분들 사이에서도 일어나기때문이다. 우리가 신체에 남긴 흔적-이미지로서 관념을 적합하게 파악할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고, 인간이 정념적인 존재로서 감정에 휘둘리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체구조와 변용과의 관계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인지생물학자인 마뚜라나/바렐라의 개념을 빌려와보자. 마뚜라나에게 생명(개체)이 존재한다는 것은 주변환경과 끊임없는 재귀적 상호접속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생명(조직)을 잃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생물이 가지고 있는 신체구조이다. 예를 들어 책상을 떠올려보자. 책상은 다리가 셋, 넷, 다섯을 가진 구조가 가능하고, 유리, 나무, 철제로 된 다양한 재질도 가능하다. 다섯개의 다리를 가진 책상이 다리 하나가 부러졌어도, 혹은 색을 다시 칠했다 하더라도 그 개체는 여전히 책상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지만 그 책상이 뭔가를 올려놓고 일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버렸다면 우리는 그 책상이 ‘조직(개체성)’을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 역시 다양한 주변환경과 마주치면서 살아간다. 인간 역시 생명조직을 손상시키지 않는 한에서 주변환경과 상호작용을 주고받을 뿐이고, 마뚜라나는 이런 재귀적 상호작용을 구조접속(structural coupling)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은 주변환경과의 마주침 속에서 복숭아에 알레르기가 발생하기도 하며, 다른 사람은 환경과의 또다른 마주침 속에서 똑같은 복숭아를 섭취하면서 건강해지기도 한다. 스피노자에게 한 개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주변의 다른 개체들과의 마주치면서 변용시키고 변용되는 가운데 개체성을 유지하는 것이라면, 마뚜라나에게는 주변환경과 구조접속을 하면서 조직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나의 개체를 변용시키고 변용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하게 되면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하나의 동물, 인간, 개체를 (고정된) 형식이나 기능으로 정의하지 않게 되며, 더 나아가 하나의 주체로서 정의기보다는 다른 것과의 상호 변용 상태에 있는 관계체로서 보게 된다. 어떤 불특정의 한 동물에 대해 우리가 그 변용능력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짐을 끄는 말은 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노역하는 소와 좀 더 많은 공통적인 변용능력들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체는 외적인 구조만이 아니라 그 신체가 겪어온 경험들을 포함하는 그 개체의 역사라고 봐야한다. 똑같은 신체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 개체가 어떤 경험을 겪었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변용능력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마뚜라나가 언급하고 있는 늑대들의 무리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생고기를 좋아하고, 급할 때는 두 발과 두 팔(?)로 뛰는 것을 편하게 여기듯이 말이다.
신체를 새로운 철학적 사유 대상으로 ‘발견’해야한다는 스피노자의 제안은 단순히 통념과 반대로 정신에 대한 신체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신체를 발견한다는 것은 변용의 능력으로 개체를 바라본다는 것이고,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개체를 고정된 시선이 아니라 좀 더 자유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변용의 관점에서 개체를 정의하는 방식 때문에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절대적 기준을 가진 도덕과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된다. 그것은 도덕을 하나의 행위와 실천으로서, 변용시키고 변용하는 능력들의 결합으로서 사유하도록 돕는다.
스피노자는 신체를 재사유하면서 존재를 (재)사유하기를 바라고, 사유를 다시 사유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인식 조건들을 넘어 신체의 능력을 파악하고, 주어져 있는 우리의 의식 조건을 넘어 정신의 능력을 파악할 수 있기를 바란다. 평행론에서 스피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하다. 결코 신체와 정신은 상호 반비례적이지 않다는 것. 신체의 능동은 정신의 능동을 만들어내고, 신체의 수동은 정신의 수동이라는 것. 그렇게 때문에 스피노자는 계속해서 ‘당신들은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당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당신들은 신체 혹은 영혼이 이러저러한 만남, 배치, 결합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앞서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우리는 다른 개체들과 집단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개조되고, 구성되고, 다시 재구성될 뿐이다.
* 정념적 존재로서 인간과 신체를 연결시키다보니 이상하게 신체와 변용으로 마무리 되었네요.
2018.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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