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확장적 긍정으로의 욕망과 상상, 의지
-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읽기 2 -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의 5장은 그 내용과 양에서 독특하게 느껴진다. 1, 2장이 생산 중심주의 노동윤리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엮어져 있다면, 3장과 4장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으로 기본소득과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고 있다. 분석과 대안으로 이루어진 기존 책들이라면 여기에서 마무리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케이시 윅스는 에필로그 이전에 따로 한 챕터를 할당하여 ‘유토피아’라고 하는 다소 맥락없어(?) 보이는 주제를 가지고 자신의 논지를 갈무리 한다. 저자가 얼마나 5장 유토피아에 공을 들였는지는 책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케이시 윅스는 자신이 내놓은 분석과 요구들이 유토피아적이라는 한 마디로 일축될 것을 염려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이 누누히 이야기한 대로 그 요구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다른 삶에 대한 욕망과 상상, 의지이기 때문이다.
노동윤리와 가족 가치를 넘어
일과 가정의 균형. 노동시간 단축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고 중요시되는 동력이다. 하지만 케이시 윅스는 가족을 강조하는 방식이 노동 감축을 주장하는 가장 설득력 없는 주장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돈 받는 일만이 가치있다고 여겨지는 사회에서 무급 노동으로 이뤄지는 가족보다는 일의 상대적 매력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가족과 지낼 시간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이제 사람들은 일터에서 더 많은 돈을 버는 쪽을 선택한다.
노동시간 단축 운동은 가족 중심 접근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8시간 운동의 슬로건인 “8시간 노동, 8시간 휴식, 그리고 우리가 의지하는 것을 할 8시간”을 떠올려 보자. 이런 접근은 “우리가 의지하는 것”에서 중요한 요소가 여가시간임을 일깨워 준다. 여기서 핵심은 여가시간을 더 많이 확보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시간의 계산에 언제나 무급노동 항목이 포함되어야 하며,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모든 운동에는 현재 노동이 조직화되고 분배되는 방식에 맞서는 일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연설명하자면,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하루 8시간, 주 5일 근무가 풀타임 근무의 표준이 되었을 때, 대개 남자로 그려졌던 노동자는 집안의 여성으로부터 보조를 받는다고 상정되었다. 지금은 모두 당연하다고 여기는 풀타임 근무와 시간외근무는 모두 다른 누군가가 가정 내 노동의 주된 책임을 맡아 줄 수 있다고 가정할 때에만 가능한 선택지이다. 이런 이유로 이를 지지하는 담론을 만들어내는 노동윤리와 가족윤리의 협력 관계는 다양한 문화적 형태들을 통해서 유지되고 있다. 그러므로 가족의 이름으로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싸우기보다는 더 폭넓게 호소할 수 있는 요구, 관점과 자극을 자유와 자율이라는 목표를 중심으로 빚어낼 수 있다.
희망의 기획과 유토피아utopia
현재의 정치적 환경에서 기본소득과 노동시간 단축 요구는 “그저 유토피아적”이라고 허황된 이야기로 치부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케이스 윅스는 에른스트 블로흐와 니체를 꺼내 들면서 유토피아적 요구야말로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니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합리적이며 현실적이라고 주장한다.
먼저 블로흐가 아직-이뤄지지-않은 것들과 아직-의식되지-않은 것들에 주목한 이유는 과거에 짖눌리는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 희생당하는 현실에 좀 더 유동적인 잠재력과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블로흐에게 현실인 것The Real은 과정이고, 현재와 종결되지 않은 과거, 그리고 무엇보다 가능한 미래 사이의 폭넓게 갈라진 중개이다. 그가 주장하는 현실적 현실주의는 모든 현재의 순간에 미래가 탄생한다는 인식, 그 미래가 무엇이 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인식을 필요로 한다.
블로흐의 철학이 현실에 희망을 가져다주었다면 니체는 현실을 좀 더 긍정하기를 요구한다. 영원회귀는 현재가 영원히 돌아올 것이라고 믿게끔 하는 교의로 제시되는데, 니체의 영원회귀는 인식론적 제안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 개입으로 봐야 한다. 영원회귀에서 과거는 어찌할 수 없는 숙명으로 오지 않는다. “내가 그러하길 원했다.”는 의지로 과거를 되찾아 온다. 니체는 영원회귀 사상을 통해서 우리의 현재를 긍정하고 그것을 의지하라고 말한다. 그 현재가 바로 지금과 다르게 되기 위해 분투할 구성적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아주 도전적으로 묻는다. 지금이 마지막이고 이 순간이 지속된다고 할지라고 지금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을 바꿀, 자신을 “뛰어넘어 창조할” 의지가 있는가? 더 이상 “우리” 세계가 아닐 새로운 세계, 즉 우리와 같은 주체를 만들지 않을 사회의 형태를 창조하길 원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럴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하지만 니체가 그리는 삶은 홉스로 대표되는 공포에 휩싸인 자기보존이 아니다. 니체는 현재를 감싸 안고 자기를 긍정하면서, 동시에 현재와 자기를 극복할 것을 의지하라고 명령한다. 자기긍정이되 자기보존이나 자기강화는 아니어야 한다. 니체의 자기 긍정은 자기 확장적 긍정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케이시 윅스가 주장하는 실체적 유토피아는 현재가 유토피아의 구현의 장소라고 선언한다. 희망의 기획은 우리의 지금 모습을 우리가 될 수 있는 다른 모습의 구성적 기반으로 긍정하기를 요구한다. 이런 관점에서 희망찬 주체는 구성된 주체라기보다는 구성하는 주체이다. 구성하는 주체는 더 강해지려는 욕망뿐 아니라 보다 도발적으로 다른 존재가 될 의지로도 무장한 주체이다.
예나 지금이나 유토피아는 현재를 낯설게 하는 기능, 다른 미래를 향한 욕망과 상상, 움직임을 자극하는 기능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유토피아적 요구의 문제는 이들이 지나치게 유토피아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유토피아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케이시 윅스가 전통적 유토피아에서 비판적 유토피아로, 선언문에서 요구로 옮겨간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선언문은 그것 자체로도 충분히 주체를 만들만큼 자극적이다. "하나의 유령이,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로 시작되는 <공산당 선언>을 보면 선언문의 위력을 잘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케이시 윅스는 선언문의 혁명적 의제가 지닌 계획적 본성에는 미래를 향한 다수의 예기치 않은 경로들을 열기보다는 닫을 위험이 있다고 보았다. 기본소득와 노동시간 단축은 단순히 그것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을 통해서 행동하는 다중을 꿈꾼다. 그렇기에 욕망과 상상, 의지는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변화에 대한 가장 큰 동력원이 되어야 하는 긍정의 대상이다.
2017.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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