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과 법적 지반
<부르주아지와 반혁명>
법적 지반을 구출하기 위해, 즉 무엇보다도 먼저, 혁명에 당연히 귀속되는 명예를 혁명으로부터 사취하기 위해 협정 이론과 함께 공중으로 날려 버릴 지뢰를 발명하였던 것이다. <부르주아지와 반혁명> 481
이 글은 캄프하우젠 내각에 대한 맑스의 비판이다. 분명히 혁명을 이루었는데, 이 혁명의 결과를 캄프하우젠이 다시 왕정에게 돌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행동에 대해서 캄프하우젠이 주장하는 정당성은 바로 ‘법’이다. 법적 지반을 수호하기 위해서 사회를 되돌려야 한다는 황당한 말! 하지만 맑스가 황당하다고 했던 이 말은 현재를 몽환적으로 살고 있던 나를 확실하게 잠에서 깨우는 말이었다.
법률이 사회적 배경 아래에서 구성된다고 생각했고, 구성된 법률에 대해서는 항상 정당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맑스가 지적한대로 법적 지반이라는 것은 항상 혁명적 지반 아래에서 구성된다. 그리고 구성된 법이 현실에서 효력을 발생시키는 것은 법 그 자체가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다. 법이 힘을 갖는 경우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힘과 힘의 대결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때다. 결국 법이라는 것은 구성할 때나 적용할 때 모두 ‘혁명적 지반’에서 가능할 따름이다. 맑스의 말대로 낡은 법률은 구체제에서 만들어 진것이므로, 새로운 현실에서 그 법률들은 몰락해야만 한다.
여러분 여러분은 법적 지반의 수호라는 말에서 무엇을 이해하십니까? … 사회가 법률에 입각해 있다는 것은 하나의 법률가적 망상입니다. 오히려 법률이 사회에 입각해야 하며, 법률은 각 개인이 자의에 반하여 그때 그때의 물질적 생산 양식에서 생겨난, 사회의 공통의 이해와 욕구의 표현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이 낡은 법률들이 낡은 사회 상태를 만들지 않았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낡은 법률을 새로운 사회적 발전의 기초로 만들 수 없습니다. 이 낡은 상태로부터 이 낡은 법률들이 생겨났으므로 그 상태와 함께 그 법률들도 몰락할 수밖에 없습니다.<라인 지구 민주주의자 위원회에 대한 재판> 517
그런데 맑스가 바라보는 ‘법’은 그리스 시대의 ‘신탁’과 상당히 닮아 있다. 일반적으로 신탁이라고 하면 신에게서 주어진 명령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신탁을 따르는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신탁에 대한 태도를 이와는 상당히 다르다. 신탁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을 해석하려는 사람들의 의지이다. 페르시아 전쟁에서도 ‘나무성벽’이라는 신탁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구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나무성벽’을 아테네 도시를 둘러싼 성벽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를 주축으로 한 이들은 ‘나무성벽’을 함선으로 해석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신탁 해석은 이를 받아든 시민들의 의지의 반영이고 힘과 힘, 토론의 전장일 뿐이다.
법이 만들어졌다는 점이 물론 현실에 대한 충실한 반영이고, 사회적 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들어진 법을 현실에서 작동시키는 것은 결국 ‘혁명적 지반’, 힘과 힘의 대결에서 이겨낼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법이라는 것은 주어진 신탁처럼 매번마다 힘과 힘의 대결일 수밖에 없다.
노동법이 있었지만 이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몸을 불살랐던 전태일, 반대로 故백남기 농민에 대한 부검영장 역시 법에 대해 발부되었지만 영장이 발부되었다는 것이 그 자체로 정당성을 갖는것은 아니다. 신탁이 주어졌을 뿐이다. 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할 것인지는 우리 몫이다. 여기에서도 역시 힘과 힘의 대결에서 밀리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16.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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