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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셰익스피어 비극과 공동체

by 홍차영차 2017. 6. 19.

비극과 공동체


키워드 : 셰익스피어, 엘리자베스 1세, 아르마다, 대항해시대-종교개혁-르네상스, 공동체와 사회, 비극, 물신



2017년 현재까지도 여전히 무섭고(?) 불온하게 여겨지는 <자본론>과 마르크스! 그런데 이런 마르크스가 평생동안 가장 존경했던 작가가 바로 셰익스피어였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존경심으로 마르크스는 그의 작품들을 꼼꼼하게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의 많은 부분을 외우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아이들이 셰익스피어를 읽는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기까지 했다는. 이렇게 볼 때 <돈과 공동체>를 주제로한 첫 번째 텍스트로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는 것은 필연이지 않을까. ^^


The Mighty Display of Spanish Armada in 1588



무적함대의 몰락와 영국의 부흥

1600년대 전후는 셰익스피어가 가장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한 시기였다. 또한 셰익스피어가 자라온 시기는 엘리자베스 1세를 중심으로 한 영국의 전례없던 부흥기이기도 했다. 텍스트로 들어가기 전에 1600년 전후에 걸친 4개의 사건을 토대로 <아테네의 타이먼>이 쓰여진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자.

우선 멀리 100여년 전인 1492년은 콜럼버스가 북아메리카를 발견한 해이다. 유럽은 북아메리카를 발견했을 뿐 아니라 곧이어 인도를 연결하는 항로를 개척했고, 세계일주를 실현했다. 분명 16세기 대항해 시대를 연 것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다. 하지만 대항해 시대의 열매를 맛본 것은 사실 영국과 네덜란드였다. 엘리자베스 1세때 영국은 개신교를 지지하면서 유럽 대륙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함대 역시 스페인에 대항하여 힘을 키워갔다. 함대라고 하지만 실상은 영국의 해적질이 힘을 더해갔다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1588년 무적함대로 불렸던 스페인의 함대는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영국에게 패하게 되고, 해양의 주도권은 영국과 네덜란드로 넘어가게 된다.


Queen Elizabeth I - from the Armada portrait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가 죽고 영국은 혼란에 빠진다. 섬나라 영국에서는 종교 복고가 일어났고, 이런 종교적 박해를 떠나 1620년 청교도들 중 일부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북아메리카 뉴잉글랜드 에 도착하게 된다. 17세기 초는 영국뿐만이 아니라 유럽 대륙도 혼란의 시기였다. 최초의 국제적인 전쟁이라 할 수 있는 30년 전쟁이 발발했고, 그 결과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맺게 된다. 그리고 베스트 팔렌 조약을 시작으로 유럽에 토지와 주권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인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공동체의 해체와 황금 물신

셰익스피어는 바로 이런 시대의 격변기에 자랐고, 자연스럽게 시대를 대변하는 작품을 쓰게 된다. <아테네의 타이먼>에서는 자세하게 나오지 않지만, 셰익스피어의 시대는 상업 자본주의 시대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베니스의 상인>의 주인공인 안토니오가 모든 재산을 잃게 되었던 것도 대항해 시대에 상선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고, 이전에는 없었던 ‘이자’가 문제가 되기 시작한 때였다.



샤일록, 나는 이자를 수수하는 금전거래를 해본 적이 없지만 

내 친구의 시급한 필요를 해결해주기 위해서 관행을 깨려 하오.

… 우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가 생식력이 없는 쇠붙이에 대한 이자를 친구에게 받겠소? (<베니스의 상인> )



<아테네의 타이먼>을 요약해 보면 그 내용은 단순하다. 아테네의 부유한 귀족 타이먼은 주변의 사람들을 친구라고 믿고 그들에게 아낌 없이 돈을 준다. 하지만 그가 파산하자 친구라고 여겼던 모든 사람들은 그를 멸시하고 등을 돌린다. 이제 타이먼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인간들을 저주하면 사람들을 피해 산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내게는 내가 가진 것보다 그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더 소중한 존재(26)”라고 말했던 타이먼은 마지막 부분에서 “가슴속에 싹튼 이 증오심이 모든 종류의 인간, 전 인류를 향한 증오심으로 자라나도록(109)” 해 달라고 저주를 퍼붓는 인간으로 변했다. 타이먼의 불행은 자본주의 사회에 태어난 공동체적 인간이 느끼는 비애가 아닐까. “친구의 소유가 또한 나의 소유라 말할 수 있는 세상(31)”을 꿈꿨던 타이먼이 느꼈을 절망!



우리는 흔히 자본주의 원리가 봉건사회를 해체시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계보학적으로 볼 때 이는 정반대이다. 즉 봉건사회의 해체로 인해서 자본주의 사회가 탄생했다. 근대 (자본주의) 국가의 기틀이 되는 사회계약론을 떠올려보자. 17세기에 사람들은 왜 ‘계약’을 떠올렸을까? 왜냐하면 이미 ‘공동체적 유대’가 깨졌기 때문이다. 유대가 깨진 인간들이 어떻게 다시 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서 사회계약론은 만들어졌다. 다시 말해 사회란 ‘비동료들간의 유대’이고, ‘분리된 인간’을 전제하고 있다. 바로 이 부분에서 화폐(물신)가 등장하게 된다. 요약하면 근대 자본주의 사회란 화폐(로 맺어진)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다. 이제 화페 그 자체가 공동체가 아닌 곳에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화폐가 등장하면 기존의 공동체들은 해체되어야 한다. 

“황금은 흑을 백으로, 악을 선으로, 부당함을 정당함으로, 추함을 아름다움으로, 비천함을 고귀함으로 바꿔 놓는다.(115)” 이뿐 아니라  사람들은 황금이 “한물간 과부를 멋진 신붓감으로 만들고”, “구역질 나는 창부를 봄날 꽃처럼 향기롭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이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 믿음이 바로 마르크스가 상품(교환)과 화폐에서 보았던 물신주의(fetishism)이다.

어떤 물건이 상품이 된다는 것은 그것이 다른 상품과의 교환가능성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상품의 가치란 다른 상품들과의 관계로만 나타날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화폐가 등장하면 이 관계는 시야에서 사라지게 된다. 즉 우리는 관계가 아니라 상품 자체 혹은 화폐 자체가 내재적 가치를 갖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셰익스피어와 타이먼이 비판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실상 중요한 것은 상호간의 관계이지 화폐가 아니라고, 화폐란 우리들 사이를 이어주는 수단일 뿐이라고.


다시 비극으로 - 가장 선한 얼굴에서 가장 악한 얼굴로

타이먼의 이야기는 옛 화가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어떤 화가가 인간의 가장 선한 얼굴을 그리기 위해서 사람을 찾고 있었다. 수년간 끝에 마치 천사와 같은 평안하고 온화한 얼굴의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10년쯤 지났을까 화가는 이제 인간의 가장 악한 얼굴을 그리기 위해서 여행을 떠났다. 몇년이 지나 그는 사악하고 비열한 사람을 만나 그림을 그리려고 했는데, 그는 그림을 완성하면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그리고 있는 그 얼굴이 바로 자신이 천사의 얼굴이라고 그렸던 바로 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얼마나 악해질수 있는지 혹은 착하게 살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하지만 나는 다른 편에서 이 이야기를 생각해보고 싶다. 가장 선한 얼굴을 한 사람과 타이먼이 가장 악한 얼굴과 최악의 저주를 내뿜는 인간이 된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타이먼은 돈이 있었을 때나 없었을 때나 항상 똑같은 신념을 유지했을 뿐이다. 주변 인물들이 타이먼을 멸시하고, 어리석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관계가 아니라 오로지 황금이었기 때문이다. 어중간한 방식으로는 어떤 사람이 친구인지 알 수 없다. 극단적인 상황 속에 있을 때에야 리트머스 종이의 변화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왜 비극이었을까? 비극이 소통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비극 예술의 전성기는 바로 아테네 민주주의 시대이다. 개인들이 서로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 할 수 있던 시대! 영웅들과 귀족들이 주도했던 시기에는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해 주는 서사시가 꽃을 피웠고, 서사시 이후 평민들이 부상할 때 서정시는 오로지 개인의 감정만을 드러냈다. 하지만 지금은 서사시의 위계를 아무도 원하지 않고, 서정시를 가지고서는 소통을 이뤄낼 수 없다. 바로 이 때 고대 아테네는 비극을 통하여 상호 소통을 추구했다. 비극적 대화를 통한 상호 소통!

비극은 분명 상호 소통을 추구하지만 적당한 타협은 없다. 비극적 대화는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배경으로 한다. 즉 타자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손만 잡는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화자 각자가 자신의 논리를 극단으로 밀고 나아갔을 때, 바로 그 때에야 상호 소통의 길을 발견할 수 있다. 타이먼이 죽기까지 혹은 죽음을 넘어서까지 아테네 사람들을 아니 모든 인간들을 저주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베니스의 상인>에서 샤일록이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끝까지 요구하는 것을 보았을 때, 사람들은 머릿 속에서 어떤 것을 떠올렸을까.

비극은 항상 이렇게 새로운 질서가 필요한 시기에 등장하는 것 같다. 기존의 규칙과 법들은 효력을 잃었기에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야 할 때.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함께 고민하는 것이고, 이런 고민 속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방안이다. 이런 이유로 비극 작가들은 어떤 인간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질문한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냐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다. 동일한 질문을 서로 공유하는 친구들이다. 이제 누구도 정답이나 법칙을 주장할 수 없는 시대이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본원적(동일한) 질문을 공유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가 공동체에 있다는 것은 이제 정답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질문을 품고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고통과 비극은 없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더 사유해야 할 것이고, 고통과 비극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바로 지금이 비극이 필요한 시대이고, 타이먼의 비극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2017.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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