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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에티카를 읽는다

by 홍차영차 2017. 3. 12.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증명된 윤리학, <에티카>



Euclid's Elements of Geometry, Model for the Rational Method of Spinoza's Ethics



왜 기하학적 증명일까

양심과 죄책감에 호소하는 도덕과 달리 윤리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다른 개체와 맺는 관계 속에서 고려해야 할 일종의 내재적인 규칙이다. 다른 말로 풀어보면 윤리학이란 자신이 견지해 온 삶의 방식이고, 사물과 사람을 대하는 삶의 태도와 관계된 것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지금까지 서구의 윤리적 전통이 ‘미신적 편견’과 대중들의 약점을 이용하는 ‘정치 권력’에 의해서 극단으로 왜곡되어 있음을 더빗 형제의 죽음으로 경험했다.[각주:1] 스피노자가 꿈꿨던 노예의 삶을 벗어난 자유로운 인간들의 새로운 사회체를 구성하려먼 지금까지와 다른 윤리학이 필요하다. 이에 스피노자는 ‘기하학적 질서’에 따른 윤리학을 구상했다.

분명 17세기는 과학혁명의 시대였고, 확실한 인식의 모범은 수학이었다. 스피노자가 기하학적 방식으로 <에티카>를 전개한 것은 이런 시대적인 배경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그는 <에티카>를 쓸 때부터 이런 그의 글쓰기 방식이 읽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어려움을 부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각주:2] “인간의 악과 불합리함을 기하학적 방식으로 다루는 일에 착수하겠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이상해 보일 것이다.”(<에티카>, 3부 서문) 이런 어려움까지 감수하면서 왜 스피노자는 자신의 윤리학을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증명’하려고 했을까?


기하학적 질서에 따른 사고방식

하나의 언어는 하나의 사고방식을 결정하다(고 생각한다.) 독일어를 말하는 사람과 한국어를 말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그 사고구조가 다르다. 말하는 방식이 그 사람의 사고 방식에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다. 얼마전 본 영화 콘택트(Arrival, 2017) 역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새로운 외계 언어를 갖게 되면서 주인공은 이제 선형적인 시간이 아니라 영원의 시간으로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이 영화에서 본 것처럼 <에티카>에서 스피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그 말하는 ‘방식’간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자연의 질서가 수학적 필연성을 갖는다면, 우리 관념의 질서 역시 수학적 필연성을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에티카>를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증명하는 방식을 선택한 것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가장 잘 전달하는 표현 방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티카>에서 그는 자신의 ‘정리’를 ‘증명’하면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주의 깊은 사람은 누구든지 알 수 있다.”라거나 “누구라도 명백하게 이해할 수 있다.”라고. 이는 분명 자신의 책을 이해할 정도의 ‘지성’을 가진 소수의 사람을 겨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스피노자는 왜 이런 말을 계속해서 말했을까. 우리들에게 지적인 긴장감과 자극을 주기 위해서였을까. 

스피노자는 <에티카>를 읽으면서 자신이 제시한 ‘기하학적 질서에 따른 증명방식’을 충심히, 세밀하게 읽어간다면 사람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미신적 편견’과 ‘정치권력의 남용’에 휘둘리지 않는 인간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를 단순한 열심히 읽는 일에 한정되지 않는다.

<에티카>를 마주치게 되는 초심자는 ‘외국어’를 읽는 것과 같다고 표현한다. 이는 과장된 표현도 비유가 아니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에티카>를 읽으면서 사람들이 스스로의 사고를 새롭게 하기를 바랐던 바이다. 하지만 새로운 언어는 쉽게 익혀지지 않는다. 외국어로 꿈을 꾸는 지경에 이를때에서야 그 언어를 제대로 익혔다고  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에티카>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열심히 읽는다는 것을 넘어서 스피노자가 의도했던 ‘기하학적 질서’로 사고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수학적 증명을 할 때는 수학적 언어를 사용하고, 수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에 아무런 이의가 없다. 미적분을 증명할 때에 사용하게 되는 수학적 ‘정의’, ‘공리’, ‘정리’에 대해서 의심을 품지 않는다. 동일하게 우리는 <에티카>를 읽으면서 마주치게 되는 “정리 8 : 모든 실체는 필연적으로 무한하다. 증명 : 동일한 속성을 가지는 실체는 오직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정리 5에 의해), 또한 그거스이 본성에는 존재한다는 것이 속한다. (정리 7에 의해)… (정의 2에 의해)” 이 형식에 겁 먹지 말아야 한다. 수학처럼 차근 차근히 정의, 공리, 정리를 들춰보면서 증명을 따라가야 한다.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또한 이후 맑스가 언급했던)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이외의 방식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스피노자는 <에티카>의 개요라고 불리는 <신과 인간과 인간의 행복에 대한 짧은 논문>의 형식과 달리 <에티카>를 기하학적으로 쓰기로 결정했다. 스피노자는 “우리 모두는 동일한 인식 능력을 부여받았기에 우리가 충분한 자제심과 지적으로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이면서 판단한다면 누구든지 가장 높은 단계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를 위해 남은 일은 <에티카>를 그의 방식에 따라서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 읽어가는 것 뿐이다.


2017. 03. 12





  1. 프랑스와의 전쟁이 발발하자 군주제를 지지하는 대중들이 공화주의자였던 얀 더 빗형제를 찾아가 그들을 갈기갈기 찢어 죽였다고 한다.이 소식을 듣고 스피노자는 "야만의 극치"라는 자보를 들고 시내로 나가려고 했으나 목숨의 위험을 염려한 친구들의 만류로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은 20세기 초 <에티카>에 대해 “감당하기 어려운 장치와 같은 정리, 정의, 따름정리, 주석 등의 뒤얽힘, 이 복잡한 장치와 압도적 힘은 <에티카> 앞에선 초심자가 마치 무장한 전함 앞에 서 있는 것처럼 경탄과 공포로 충격을 받을 만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에티카를 읽는다>, 스티븐 내들러, p72) — 조금은 위로가 된다. -.-;;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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