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제 : 플라톤 <국가>를 변론하다 -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에 불과하다”라고 화이트헤드는 말했습니다. 그 정도로 플라톤 철학이 인류 역사에 미친 영향력이 크다는 말입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플라톤 철학을 통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으려고 시도하는 것을 보면 지금도 이 말이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해석의 주요 대상이 되는 것은 플라톤의 <국가>입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국가>에 대한 재조명에도 불구하고 현재 플라톤 철학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국가>에 나오는 ‘철인왕’, ‘이데아’와 같은 개념들이 우리 시대를 대변하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철학을 ‘삶에 대한 지혜’라고 본다면 플라톤이 제안했던 개념들은 관념적이기보다는 그가 살았던 시대와 플라톤 개인의 경험이 녹아있는 구체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제7편지>를 중심으로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 플라톤이 경험했던 여행에 비추어 <국가>와 플라톤 철학을 다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질문자와 기획자
플라톤
플라톤의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차이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최초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아무런 글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철학은 온전히 플라톤의 대화편을 통해서 이해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런 이유때문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철학의 차이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둘의 차이점은 무엇이고, 그 차이는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요?
먼저 소크라테스는 아테네가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지 10년쯤 후인 기원전 469년에 태어났습니다. 다시 말해 그가 소년시절을 보낼 때쯤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황금시대를 열고 있었습니다. 또한 소크라테스 자신이 두 번의 전투에 참가하면서 그 아테네의 융성하는 문화가 이웃 도시국가들의 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스스로 경험했습니다. 그는 질문할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부흥과 쇠락을 모두 경험하면서 자신의 철학적 행각을 시작하는데, 아직은 도시 국가의 ‘활력’을 갖고 있는 그리스가 다시 일어서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는 ‘최초의 질문자’로서 철학을 시작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것은 무엇인가’라고 아고라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질문하면서 그들 스스로 ‘자신(아테네)이 하는 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기를 촉구한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등에’로 표현한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지만 플라톤이 경험한 시대는 조금 달랐습니다. 플라톤이 태어난 해는 기원전 427년이었고, 그가 성인이 되어갈 무렵(기원전 414년 시라쿠사 원정 전후)에 아테네는 그 힘을 완전히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사실 펠레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을 치루면서 아테네와 스파르타뿐 아니라 그리스 전체가 그 힘을 모두 소진하게 되었습니다. 즉 플라톤이 본격적으로 철학에 전념하게 되는 기원전 399년 시기에는 아테네뿐만 아니라 그리스 도시국가 전체가 쇠락의 길을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렇기에 플라톤은 더 이상 ‘질문하기’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고, 새로운 질서를 구체적으로 ‘기획(praxis)’해야만 했습니다. 여기에 소크라테스와의 차이가 있지 않을까요. 소크라테스는 단 한 권의 책도 내지 않았지만, 플라톤은 이런 이유 때문에 그의 생애동안 수 많은 책과 아카데메이아라는 공동체를 설립했습니다. 플라톤은 완전히 무너진 토대 위에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했습니다.
<국가>를 기획하다
<국가>에 대한 구상은 이미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하는 기원전 399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겪고 난 플라톤에게 정치란 이제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거나, 통치자가 철학을 하는 것’밖에 답이 없게 되었습니다. 특히 새로운 정체에 대한 그의 구상은 앞서 언급한 시라쿠사의 참주정을 경험하면서 구체화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플라톤은 참주정의 실상과 철인왕의 가능성 두 가지를 모두 경험하게 됩니다.
플라톤 <Politeia>의 manuscript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 플라톤은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죽음’에 대해서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했습니다. 특히 플라톤에게 영향을 준 것은 타렌툼에 있는 아르퀴타스와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뉘시오스 1세였습니다. 타렌툼은 이탈리아 끝쪽에 있는 도시국가인데 이곳은 당시 피타고라스 학파 사람들의 새로운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플라톤은 이곳에서 피타고라스 학파의 철학자인 아르퀴타스를 만나 영혼 불멸과 영혼 윤회의 이야기라든지, 기하학 관련된 것을 토론하면서 피타고라스 사상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습니다.
아테네는 시라쿠사와의 싸움(기원전 414년)에서 대패하면서부터 펠레폰네소스 전쟁에서 힘을 잃어갔습니다. 이와 반대로 시라쿠사는 이 승리 이후 점차적으로 자신의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디오뉘시오스 1세는 아테네 원정을 물리친 헤르모크라테스의 일개 수하였는데, 그가 정쟁의 와중에서 죽임을 당하자 민중의 지지를 얻어 종국에는 참주의 지위에 오른 입지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신흥 강국으로 자신의 세력을 넓히던 시라쿠사의 디오뉘시오스 1세는 플라톤 에게 참주에 대한 명징한 모델을 보여주었습니다.
플라톤이 처음 시라쿠사에 간 것은 디오뉘시오스 1세의 초청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참주는 억지로 자신과 친교를 맺을 것을 플라톤에게 강요했습니다. 플라톤은 당연히 거절했고, 이로 인하여 그는 노예로 팔려 죽을 고비를 겪게 됩니다. 디오뉘시오스의 처남인 디온의 만류 덕분에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디오뉘시오스 1세에게 플라톤이 했던 이야기에서 우리는 ‘철인왕’의 인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강한 자가 덕에 있어서 뛰어나지 않은 한, 강한 자의 이익은 자족적이지 않다”
디오뉘시오스가 참주가 된 것은 전적으로 민중들의 지지에 의해서였습니다. 기원전 409년 카르타고의 공세로 시칠리아의 도시들이 위험에 빠졌을 때 이 위기를 구한 것은 분명히 젊은 디오뉘시오스였습니다. 하지만 기원전 405년 참주가 된 후 그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멈추어버렸습니다. 플라톤이 찾아갔을 때인 기원전 389년에 그는 변해 있었고 그 주변에는 중상모략하는 작자들만 있었지 철학적 동지들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는 작은 충고도 들을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라쿠사에서 목숨을 걸고 경험한 참주제는 그야말로 최악의 정체라는 것을 확인하게 해 주었습니다. 플라톤은 그곳에서 모두가 지지했던 한 사람이 타락하면, 나라 전체가 어떻게 고통받는지 그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시라쿠사의 여행을 통해서 플라톤은 새로운 정치체제에 대한 실현가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그곳에서 그는 철학하는 지도자에 대한 후보자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플라톤은 이곳에서 ‘질문’을 넘어 새로운 정치에 대한 ‘기획’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시라쿠사 여행에서 만난 젊은 친구 ‘디온’을 통해서 플라톤은 철학자 통치자, 철인왕이라는 아주 현실적인 개념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디온과의 만남은 2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플라톤에게 그는 아주 특별했으며 지적이고 도덕적인 품성을 갖춘 젊음이었습니다. 플라톤과의 대화를 통해서 디온은 철학에 이끌리게 되었고, 최선의 법에 의해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실 디온은 그 밖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그리고 당시에 내가 행한 논의에 대해서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고, 내가 만난 젊은이들 중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의 명민함과 열성으로 그것을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남아 있는 생을 대다수 이탈리아인과 시칠리아인보다는 좀 특별하게 살고 싶어 했습니다. 왜냐하면 쾌락 및 여타의 방종보다 덕을 훨씬 더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죠. <제7편지> 327b
플라톤이 <국가>를 쓴 것은 첫 번째 시라쿠사를 다녀온 뒤 얼마 있지 않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다시 말해 플라톤에게 <국가>는 이런 경험을 통해서 나온 매우 현실적인 타개책이었습니다. 플라톤은 디오뉘시오스 1세가 다스리는 현실을 보면서, “그런 나라들의 법률상태란 행운을 동반한 놀랄 정도의 대책 없이는 거의 구제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테네가 다시 올바르게 서려고 한다면, 그리고 신흥 강국인 시라쿠사가 참주정과 민주정 사이의 혼란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면 철학자이자 통치자인 철인왕의 법을 따르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15. 11.23
- 여기에서 ‘기획자’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전체 틀을 먼저 구상하고, 그것만을 목표로 가는 사람을 말하지 않는다. 본 글에서 주장하는 기획자는 당대의 현실에 붙어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실천하는 사람으로 보고 있고, 그런 이유로 현재의 기획자라는 제목을 붙였다. 또한 이론을 포함한 실천가라는 뜻으로 프락시스(praxis)와 연결된 개념으로 적었다. [본문으로]
'그리스 > 플라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재의 기획자, 플라톤 2 (0) | 2015.12.04 |
---|---|
[그리스철학] 옳고 그름, 법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0) | 2015.06.16 |
동굴의 비유로 바라보는 배움 - 3 (0) | 2014.05.02 |
동굴의 비유로 바라보는 배움 - 2 (0) | 2014.05.02 |
동굴의 비유로 바라보는 배움 - 1 (0) | 2014.05.0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