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다는 것은 혁명이다.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사키 아타루는 이 책을 통해서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근원이고, 그 중에서 읽는 것, 책을 읽고 말았기 때문에 혁명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과연? 루터 말고도 책(성서)을 읽은 사람은 많았고 사사키 아타루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책(니체)을 읽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야 하는게 아닐까? 어떻게 읽어야 하고,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라는 한층 구체적인 것으로.
인간의 감각 중에서 자신에게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시각을 이용하는 읽기가 아니라 청각을 통해서 영향을 주는 음악듣기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시각 정보가 시신경을 거쳐서 뇌로 전달되고 뇌에서의 추가적인 해석 작업이 필요하다. 반면, 음악은 소리가 뇌로 직접 전달될 뿐 아니라 온 몸으로 박자, 리듬, 곡조를 느끼게 되어 직접적으로 인간의 감성을 흔들기에 가장 효과적이다. 음악 없는 드라마, 영화는 상상할 수 없는 것. 음악듣기처럼 읽었다라는 것만으로 인간의 마음을 흔들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사사키 아타루 왜 이처럼 이야기 할까?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 밖에 없는것이라고’ 이 말은 우선 제대로 된 ‘읽기’가 전제 되어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쓴 것은 읽을 수가 없다. 당연하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는다’는 것은 내가 ‘그’가 될 수 없기에 읽을 수가 없는 것. 읽어버리면 미쳐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읽는다는 것은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들을 오롯이 비어내고, 내가 아닌 ‘그’가 이야기하는 것이 귀 기울여야만 가능하다.
그럼,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 알아버리면 미쳐버릴 정도의 것이어야 한다. 요컨대 읽어도 전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어쩐지 싫은 느낌이 드는 것’이야말로 독서의 묘미이며, 읽고 감명을 받아도 금방 잊어 버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자기 방어’라고 말한다. 사사키 아타루는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단지 문자를 쓰는 것'만'이 특권적으로 권력, 나아가 혁명에 속한다는 오랫동안 계속된 사고의 도정마저 답파하고자 한다. 영상의 시대여서 자극적이고 쉽게 ‘읽히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은 언급할 것도 없이 현재의 읽기는 지식을 정보로서 ‘쇼핑’하는 시대가 되어서 텍스트를 제대로 읽는 것이 쉽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핑계는 없다. 읽는다는 것은 자신이 읽는 책을 선택하는 것이고 자신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 그저 나열된 ‘정보’를 수집하는 것에만 만족하면서 살아갈 것인가 혹은 읽어낼 것인가는 나의 선택이 된다.
한 권, 한 권의 책을 읽어나가거나 혹은 한 권의 책을 계속해서 읽는다는 것은 세상의 정보(명령)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나를 향해 변형의 자기 명령을 내리는 것. 책을 읽은 나를 세상은 미쳤다고 취급할지 모르겠지만 읽어버린 내가 보기에는 세상이 미쳐 보이게 된다. 그럼, 결론은 하나 내가 미쳐 버리든지 아니면, 미쳐 있는 세상을 향해 구원의 손길을 내밀던지.
2013. 11. 19
*제목은 파울 첼란의 싯구에서 따온 것이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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