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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 세미나

수지도서관, 다시,문학) 6월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읽기

by 홍차영차 2022. 6. 3.

6월에는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읽습니다.

들뢰즈와 학창시절 친구였고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시험에 떨어지면서 문학으로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40이 넘어 첫 소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썼는데, 이 소설이 나오고 나서 들뢰즈는 이에 대한 논문을 썼다고 하네요. ^^

문학과 철학의 결합이라면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 소설을 스토리 자체로도 흥미롭고 문학적인 비유도 너무 좋습니다.

 

https://lib.yongin.go.kr/suji/20005/bbsPostDetail.do?tabManageCd=MB&postIdx=193384 

 

 

수지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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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소개 :

철학이 삶에 대한 해체이고 문학은 삶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우리는 미셸 투르니에 소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 철학과 문학의 절묘한 결합을 볼 수 있습니다. 미셸 투르니에는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교수자격 시험에 떨어지면서 문학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데, 이런 복합적 경험과 욕망 때문인지 몽환적이고 추상적인 글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개념적이면서 구체적인 철학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17세기 문자문화와 청교도주의적 아비투스(Habitus)를 가진 로빈슨과 구술문화적 야생의 사고를 갖고 있는 방드르디의 충돌을 보면서 정신의 발견과 자기 인식으로 이야기되는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차이를 경험해봅니다. 

강의 및 토론 내용 :

로빈슨은 방드르디가 기진맥진할 정도로까지 정력을 바쳐 만드는, 목표물도 잡을 짐승도 없는 그 활의 의미가 무엇일지 오랫동안 생각해보았다. ...... 화살은 적어도 150피트 되는 높이에까지 날아올랐다. 거기서 잠시동안 멈칫거리는 듯하더니 해변 쪽으로 떨어지지 않고 수평으로 기울어지면서 새로운 힘을 내며 숲을 향하여 날아갔다. 화살이 첫 번째 나무숲의 장막 뒤로 사라지자 방드르디는 기쁨에 빛나는 얼굴로 로빈슨에게 몸을 돌렸다. “화살이 나뭇가지들 속으로 떨어질 거야. 그러니 그걸 다시 찾지 못할걸.” 로빈슨이 그에게 말했다. “나는 그걸 다시 찾지 못할 거야. 그렇지만 그건 화살이 절대로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지.”하고 방드르디가 말했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240쪽)

 

17세기 유럽의 문명화된 의식과 청교도적 생활양식을 갖고 있던 로빈슨은 야만적이고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방드르디의 행동을 보면서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행동은 단순히 이해할 수 없음에서 끝나지 않고, 끝없는 분노와 폭력을 유발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폭력에 로빈슨 스스로 놀라기도 합니다. 

로빈슨과 방드르디의 차이를 서로 다른 아비투스(Habitus,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신체/정신에 구조화된 성향:부르디외)라고 말할 수 있지만, 다르게 보면 문자문화와 구술문화가 보여주는 정신구조의 차이로 볼 수 있습니다. 야생의 사고를 가지고 자연의 일부로 자신을 바라보면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순간을 생성으로 이끌어가는 방드르디, 기존에 만들어진 의식적 사고와 본질을 고수하면서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타자를 자신과 동일하게 만들려고 했던 로빈슨은 아주 구체적인 행동으로 서로 다른 정신구조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목표물 없는 활과 화살’을 만드는 것은 허망하고 쓸모없는 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목적과 의미가 삶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믿는 척’하는 것으로는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화살’을 만들 수 없습니다. 절대적 진리, 절대적 목표가 사라진 지금 우리는 스스로의 진리와 목표를 만들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가 창조해낸 진리와 목표를 마치 발견한 것처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로빈슨과 방드르디의 마주침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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