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 개념 발명 3 - 아펙투스affectus
: <에티카> 3부
스피노자의 이미지는 이중적이다. <에티카> 1, 2부에서 전개되는 형이상학을 마주쳐보면 정의 - 공리 - 정리 - 주석으로 이루어진 마치 문제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 수학 문제를 마주치는 느낌이다. 반면에 인간 심리를 다루는 <에티카> 3부에 도달하면 갑자기 친근해져서 누구라도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정서에는 기쁨과 슬픔만이 있다는 단순 명쾌한 출발선에서 시작해 스피노자는 질투, 연민, 호의, 자비심, 명예, 사랑, 미움과 같은 수많은 감정들을 추출해낸다. 그가 정의하고 있는 정서들의 몇몇 구절만 읽어보더라도 인간의 마음 속 깊이 숨겨져 있는 정서들을 아주 원초적이면서도 가슴 철렁하게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사랑고 미움을 외부 원인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사랑)과 외부 원인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미움)(3.12 따름정리)이라고 깔끔하게 정의. 다른 사람이 자신과 엇비슷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도 그의 실력을 시기하지 않는다고 속시원하게 말한다.(3.54 따름정리)). 국내에 출판된 수많은 스피노자 책들 다수가 3부의 ‘감정역학’을 중심으로 씌여졌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비참할 땐 스피노자>, <강신주의 감정수업>, <욕망하는 힘, 스피노자 인문학>, <고요한 폭풍, 스피노자>, <눈물 닦고 스피노자> 등등. 그리고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고, 기회도 있다.
산맥을 탐사할 때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처음부터 차근 차근히 체력을 기르고 산을 오를 때 필용한 다종 다양의 기술을 배우면서 산을 오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산맥의 중턱을 가로질러 들어가 이 산맥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젖과 꿀을 먼저 맛보면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실체, 속성, 양태라는 너무나 철학적인 아니 형이상학적인 개념‘들’에 지쳐서 산에 오르는 것을 포기하느니, 텍스트를 읽으면서 단숨에 감응affectus를 받을 수 있는 3부의 감정역학에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또한 스피노자의 감정역학은 단순히 인간의 심리학만을 다루지 않는다. 그의 감정역학은 1, 2부를 관통하는 개체론과 존재론, 그리고 4부에서 펼쳐질 정치론에까지 핵심적 원리로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감정역학
스피노자는 <에티카> 3부에서 인간 심리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것을 심리학이라고 부르지 않고 ‘감정역학’이라고 부른다. 감정역학이라는 이름naming에서부터 벌써 우리는 스피노자의 결정론적 세계관이 깊이 투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 인간은 결코 ‘국가 속의 국가’처럼 특별한 무엇이 아니다. 미사일의 궤적이나 당구공이 서로 부딪히면서 어떤 방향으로 어느 정도의 속도로 움직이는지 예측하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스피노자는 우리의 감정과 행동 역시 ‘역학’에 따라 인과적 필연성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증명해 나간다.
사물들이 물리학의 법치에 따라 인과적 질서로 움직이는 것처럼, 사람의 감정 역시 관념들의 인과적 질서에 따라 움직인다. 문제는 우리가 갖게 되는 정서의 관념은 항상 부적합한 관념이므로, 그 정서가 발생한 원인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아침에 길을 나오면서 영희를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 분명 나는 내가 좋은 기분(기쁨의 정서)이라는 결과를 알고 있다. 그런데, 나는 내가 기분 좋은 것이 집을 나오기 전에 갑자기 엄마에게 용돈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어제 알게 된 시험 결과가 좋았다는 것이 생각나서인지, 혹은 영희가 입은 그 파란색 옷이 예전에 내가 좋아하던 꽃 색깔과 같아서인지 알지 못한다. 많은 경우 우리는 결과를 원인으로 파악하면서 내가 영희를 좋아한다는 희한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장자의 우화 한 가지를 더 떠올려보자. 오랜만에 남자 친구와 함께 오리배를 타고 호수 가운데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면서 남자 친구의 손을 잡으려는 바로 그 중요한 순간 다른 오리배가 쾅 하면서 우리배에 부딪혔다. “아, 어떤 놈이야?” 알 수 없는 분노(?)가 일어난다. 무슨 생각으로 우리 배에 부딪힌거지? 혹시 날 따라다니던 그 놈이 우릴 골탕먹이려는 건가? 생각하면서 뒤를 돌아보다. 아뿔싸! 그 배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타지 않은 그 오리배는 물 위를 떠다니다가 우연히 아니 필연적으로 우리 배에 부딪혔구나! 이 (인식의) 순간 감정은 잦아든다.
전자의 사례가 감정의 원인과 결과가 전도되는 상황에 대한 것이었다면 후자는 원인들의 혼합, 원인에 대한 무지에 대한 이야기다. 사실 우리가 화를 내게 되는 대다수의 경우는 나에게 감정적 동요, 변이를 일으킨 그 사건의 맥락을, 그 사건의 인과적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을 때이다. 무지! 오리배가 물의 흐름에 따라 내려온 것임을 확인하고 그 부딪힘이 필연적이었음을 확인하는 순간 멋쩍어지고 감정의 요동은 멈추다. 아무런 맥락을 알지 못하는 자가용이 신호를 무시하고, 위험하게 내 차를 추월한다면 욕설이 입에서 나올 수 있지만, 그 안에 다친 사람이 있어서 한시라도 빨리 병원에 도착해야 하는 상황(앰뷸런스)을 알게 되면 도리어 양보하고 그 차의 안전을 기도하게 된다.
아주 단순해 보이는 인과적 질서의 파악, 이것이 스피노자 감정역학에서도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사물들의 역학과 감정의 역학은 그리 다르지 않다.
정서는 신체적이다
스피노자는 <에티카> 3부 정의 3에서 정서를 “신체의 변용이자 변용들의 관념”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로, 들뢰즈가 따로 ‘정동(아펙투스, affectus)’이라고 부르면서 강조한 “신체의 변이/변용”이다. 들뢰즈는 <에티카>나오는 affectio와 affectus를 구분하여 전자를 정서관념으로 후자를 아펙투스, 정동이라고 부른다. 들뢰즈의 논리대로 보면 정동은 결코 관념이 아니다. (정서에 대한 관념의 선재성은 ‘스피노자 개념발명 2 - 적합한 관념’에서 이야기했다.) 정동은 한자 그대로 움직임[動], 이행을 의미한다. 스피노자의 인간 심리, 감정역학은 “신체의 변이”라는 정의를 통해서 개체론, 존재론을 넘어서 정치학까지 연결될 수 있는 핵심 고리로 작동하게 된다.
정동affectus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신체의 변이/변용을 포함한다. 말 그대로 정동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화하는 이행을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감정이라고 다루는 대부분의 경우 정서(감정)는 ‘신체의 변이’(정동)이라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정동이라는 것은 정신적인 것이라기보다 신체적인 것이다! 기쁨의 정서에서 내 신체의 역량은 좀 더 완전해지고(이행), 슬픔의 정서에서 나는 덜 완전한 역량을 갖게 된다.(이행)
우선 스피노자의 개체론을 떠올려보자. 스피노자에게 개체는 항상 복합개체이다. (2부 요청1) 개체는 항상 무한히 많은, 매우 많은 부분들이 있고, 그 부분들 역시 무한히 많은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스피노자에게 정신은 관념들의 집합인데, 어떤 사물도 그 관념이 신 안에 있다.
인간 신체를 보면 팔, 다리, 머리의 부분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들은 눈, 코 입, 심장, 허파로, 또 이것들은 세포와 뼈, 연골로, 또 이것들은 미토콘드리아, 핵, 세포질과 같은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다. (2부 요청2) 즉 인간의 정신은 이처럼 많은 신체들에 대한 관념들로 구성된다. 우리가 이렇게 다양하고 복잡한 정서들을 갖게 되는 것은 이러한 복잡한 신체 구조와 신체의 작동방식 때문이다. (2부 요청 3)
또한 스피노자에게 어떤 것이 살아 있다는 것은 ‘끊임없는 변이’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스피노자 존재론에는 보편적 개념으로서 종, 속, 과, 목, 강, 문, 계라는 분류가 없다. 각각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그 존재가 보여주는 ‘변이 능력/ 행위 능력’일 따름이다. 말이라는 보편개념으로 보면, 경주마와 짐 끄는 말은 모두 말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이 두 개체는 결코 같은 ‘종’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드러내는 ‘변이 능력’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경주마는 좀 더 빠르게 달리는 능력으로, 짐 끄는 말은 좀 더 많은 양의 짐을 짊어질 수 있는 변이 능력을 가지고 있다. 스피노자에게 짐 끄는 말은 차라리 거세된 소와 같은 것이다.
인간이라는 한 마디 말로, 모든 인간을 퉁칠 수는 없다. 우리는 각자 서로 다른 것에 다르게 변이할 수 있는 고유한 존재로서 존재할 뿐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는 각자의 특이성을 그대로 인정한 채 살아갈 수 있는 든든한 배경을 맞이하게 된다. 스피노자에게 맹인은 보지 못하는 자가 아니다. 거북이는 결코 느리지 않으며, 게는 옆으로 걸어가는 이상한 동물이 아니다.
감정의 사회성
스피노자의 감정역학이 존재론, 개체론과 연관되었다는 것은 일견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감정역학이 개체론을 넘어 정치학에까지 영향을 준다는 것은 좀 많이 나간 감이 없지 없다. ‘정념적 인간’이 아무리 스피노자 철학의 토대라도 해도, 심리학으로 정치를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스피노자는 여기서 한 번 더 우리를 놀라게 만든다. 감정역학은 개체론, 존재론뿐만 아니라 스피노자 정치학의 핵심요소로 작동한다. 3부 정리 21 이후의 복합정서, 정서들의 관계를 살펴보면, 단순한 외부 물체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제2, 제3의 타자들과 결부된 정서들의 관계가 나온다. “만약 어떤 이(A)가 우리(B)가 사랑하는 것(C)에 의해……”(3부 정리2)
이러한 감정이 개체론을 넘어서 정치학에서도 핵심 요소가 되는 것은 정동이라는 ‘신체의 변이’가 발생하는 것이 외부 신체와의 마주침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정서는 더운 여름 날 시원한 물을 마시면서 신체 역량의 상승(변이)을 이끌어냈듯이 단순하게만 작동하지 않는다. 나와 내가 좋아하는 콜라가 한 병밖에 없다는 사실, 그것을 마시고 싶어하는 B, 나에게 콜라를 가져다주려는 C 그리고 C와 이야기를 하면서 콜라를 B에게 가져가는 D. 이 정도만 되더라도 여기에는 아주 다양한 감정들이 생성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쁨, 슬픔, 질투, 증오, 연민, 자비심, 오만과 같은 복잡 다다한 감정들!
3부에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존재는 오직 변이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코나투스는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니라 “실재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추구하는 노력”이자 “실재의 현행적 본질”일 뿐이다.(3.7) 이러한 노력은 정신과 신체에 관련될 때 욕구라 불리고, 이러한 욕구를 우리가 의식할 때 우리는 이것을 욕망이라 부른다. 즉, 욕망은 우리의 현행적 본질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렇게 결론내릴 수 있다. 변이 역량 = 존재 역량 = 실재의 현행적 본질(행위 역량)이자 욕망이라는 귀결!
다시 복합 개체론으로 돌아가보자. 존재 자체가 변이 역량인데, 이 변이는 내가 아닌 외부의 사물들과 신체에 의해 이뤄진다. 즉, 신체의 변이로서 정서 자체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사회적, 관계적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놀랍지 않은가? (여기에서 꼭 놀라야 한다. ^^) 근대 사회 어디에서도 감정은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래서 개인의 감정을 사회적 관계에서, 정치에서 보여서는 안 된다고, 감정은 개인이 알아서 잘 처리해야 한다고 들어왔다. 한 편으로는 매우 일리있는 말처럼 들린다. 자신에게 떠오른 관념과 정서들의 원인을 모른채 정념에 휩싸이는 인간들이 어디서나 자신의 감정대로 행동한다고 하면, 그 어느 조직이 잘 굴러갈 수 있겠는가? 바로 이 부분에서 스피노자와 홉스, 근대의 정치론과 스피노자의 정치론이 갈라선다. 똑같은 전제를 가지고 있지만, 스피노자에게 감정은 개인적인personal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social/trans 현상이다.
개체는 항상 복합 개체로 존재하고, 그 개체의 역량이란 외부의 사물들에 대한 변이능력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근대 사회에서 ‘나’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는 항상 타자를 포함할 수밖에 없고, ‘나’라는 개체가 잘 사는 문제는 항상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풀릴 수 있다. 여기서 드디어 윤리의 문제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감정의 사회성으로 귀결된 당연히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정서는 핵심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에티카>, 스피노자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질 들뢰즈
<비물질노동과 다중> 中 ‘정동이란 무엇인가’, 질 들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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