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아내가 아니라 김지영과 정대현으로 함께 살아가기
마르크스는 상품(교환)이라는 형태(form)에 자본주의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말했다. 비교할 수 없는 상이한 특성을 가진 다양한 사물들이 ‘상품’이라는 동일한 형태를 취하면서 상호 교환가능하게 되었다고. 또한 이반 일리치는 ‘매일매일 동일한 장소에서 교사라는 사람과 연계된’ 학교의 형태는 근대 사회의 중요한 면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일리치가 보기에 이런 학교의 ‘형태’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중요한 생활양식을 종교적 의례처럼 배우고, 전달하는 장소였다. 형태가 중요하다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마치 오래 전부터 원래 그렇게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구조를 잘 살펴봐야한다. 그리고 현재 우리들의 삶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두 축은 ‘일과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김지영이 말했듯이 우리에게 일은 오로지 ‘돈을 버는 수단’이지 않(아야 하)고, 가족이란 단순히 같이 사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은 돈을 버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일하면서 관계(네크워크)를 만들기도 하고, 재밌고 좋아서 일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일은 항상 일한 댓가로 돈을 받는 ‘임금노동’을 떠올리게 하고, 가족이란 모든 일에 상관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혈연공동체-핵가족이다. 그런데 임금노동과 핵가족은 분명 근대라는 시기에 형성된 특이한 삶의 방식이고, 20세기를 넘어서면서 임금노동과 핵가족이라는 형태는 상호 영향을 주면서 크게 변화하고 있다. 소설에 드러난 현상으로만 본다면 임금노동의 형태보다는 가족의 형태가 크게 흔들리는 것 같다.
2018 퇴근길인문학 시즌 1에서는 3권을 책을 읽으면서, 하나의 구체적인 이야기로부터 확장하여 일과 가족, 일과 사랑의 관계를 분석하고 이에 대한 설득력 있는 원인들을 찾아보려고 한다. 시즌1이 끝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 하지만 일과 가족에 대한 정확한 ‘질문’을 갖는 것은 가능하지 갖는 것은 않을까.
신기하게도 <82년생 김지영>에 새롭거나 신기한 내용은 없다. 독특한 인물이란곤 단 한명도 없다. 그런데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나고 나를 힘들게 한다. 누구나 알고 있던 이야기에서 혼란을, 당황스러움을, 피로를 느끼는 이유는 뭘까. 김지영의 입에서 나오는 엄마 오지숙, 3년 선배 차지연의 이야기는 단순히 여성의 지위 향상이나 남녀 평등을 말한다기보다는 여성과 남성을 떠나 서로를 한 인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여성이기 이전에, 남성이기 이전에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되지 않을까라는 물음으로 느껴진다.
인문학 공동체에서 생활한 지 6년이 되어가고, 앞서 회사나 학교에서도 다양한 책들을 읽어왔기에 내 생각이 그리 고리타분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아니 조금은 대다수의 남성보다는 더 열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집에서 생활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짜증이 솟아날 때가 있었다.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널다보면 (다른 남자들에 비해) 왠지 모르게 내가 손해보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물론 집안 일의 더 많은 부분을 아내가 하고 있다. 나는 충분히 집안일을 ‘돕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아내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걸까.
“은영 아빠가 나 고생시키는 게 아니라 그냥 우리 둘이 고생하는 거야.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니까 혼자 이 집안 떠메고 있는 것처럼 앓는 소리 좀 내지마, 그러라고 한 사람도 없고, 솔직히, 그러고 있지도 않잖아.” p32
“그놈의 돕는다는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 살림도 돕겠다, 애 키우는 것도 돕겠다, 내가 일하는 것도 돕겠다. 이 집 오빠집 아니야? 오빠 살림 아니야? 애는 오빠 애 아니야? 그리고 내가 일하면, 그 돈은 나만 써? 왜 남의 일에 선심 쓰는 것처럼 그렇게 말해?” p144
김지영이 정대현에게 하는 이야기는 마치 나에게 해주는 말 같았다. 내가 집안일을 하면서 왠지 불편하고, 피로하다고, 찜찜하다고 느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 같다. 나 역시 가족이라는 표상을 떠올릴때 여성은 집안일, 남성은 돈을 버는 일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깊게 박혀있었구나라는 자각이랄까. 함께 산다고 수십번 말했어도 나는 여전히 ‘함께’산다는 의미를 머리로만 이해하는 듯하다.
“치사해서 안 먹어. 절대 안 먹어.”
김지영 씨는 치사하다는 단어의 뜻을 정확히 몰랐지만 언니의 기분을 알 수 있었다. 할머니의 억양과 눈빛, 고개의 각도와 어깨의 높이, 내쉬고 들이쉬는 숨까지 모두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말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최대한 표현하자면, ‘감히’ 귀한 내 손자 것에 욕심을 내? 하는 느낌이었다. 남동생과 남동생의 몫은 소중하고 귀해서 아무나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되고, 김지영씨는 그 ‘아무’보다도 못한 존재인 듯했다. p25
“부담스러워서가 아니라 김지영 씨의 일이 아니라서 그래요. 그동안 신입 사원을 받을 때마다 느낀 건데, 여자 막내들은 누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귀찮고 자잘한 일들을 다 하더라고. 남자들은 안 그래요. 아무리 막내고 신입 사원이라도 시키지 않는 한 할 생각도 안 해. 근데 왜 여자들은 알아서 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p112
학교라는 구조 속에 오래 있으면서 명령에 복종하는 법을 몸에 익혔듯이, 핵가족이라는 형태 속에서 남자와 여자는 특정한 사고방식을 몸에 새기게 되었다. 노골적으로 ‘너는 아무 가치 없는 사람이야’라는 말을 듣지 않았지만, 모두가 그런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살아온 여성들이 ‘누가 하라고 하지 않는데도 커피를 타는’ 모습은 어찌보면 계산된 당연한 결과인듯 하다.
작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 속 인물들의 이름을 ‘성’까지 붙여서 불러준다. 김지영, 정대현, 오미숙, 차지연이라는 정확한 이름을 계속해서 불러주면서 현 시대의 개개인들이 한 개인으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크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름 외에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핵심은 ‘성’이다. “성에 기반한 젠더는 사랑, 결혼 가족 구성, 출산, 양육, 노령화를 포하한 사적인 영역부터 경제, 종교, 정치, 미디어, 학교 등 모든 공적 영역에 작동하는 강력한 체제”이기 때문이다.(p180)
알고 있었지만 모른체 하고 있었던 사실들이 담론의 장으로 올라온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적 변화의 힘이 크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기존의 일과 가족의 형태로 사회를 구성하기 어렵다. 김지영이 겪는 일상의 어려움은 단순히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 옆에 있는 정대현의 문제이기도 하고 이들과 연결된 모든 사람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새로운 형태의 가족, 일의 발명이 필요하다. 남편과 아내라는 이름보다는 김지영과 정대현이라는 한 사람과 한 사람이 어떻게 함께 잘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새로운 질서를 만든다는 것은 기존 질서를 바꾼다는 뜻이고, 혼돈chaos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끊임없이 위험이 상존하는 사회이기도 하고, 계속해서 그 구조와 질서가 변화하는 액체같은 사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난장에 들어서기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울리히 벡과 바우만이 말했듯이 바로 지금이 이 혼란을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여기면서 직면할 시기이다.
2018.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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