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과 공동체 - 질서잡힌 카오스
<퇴근길인문학>은 함께 읽으면서 몸을 깨우고, 텍스트를 나침반 삼아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각자에게 보이지 않던 길을 걸어보기를 꿈꿉니다. (2017)
<퇴근길인문학>은 자신의 삶에 대한 연구자가 되어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공부하면서 고독한 연구자가 되기보다는 함께하는 즐거움을 아는 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2018)
앞선 두 문구는 <퇴근길인문학>의 슬로건으로 새로운 시즌을 시작할때마다 사용하던 문장들이다. 잘 살펴보면 이 문장들에는 너무 자주 쓰여서 눈에 잘 띄지 않지만 강조하고 싶은 단어가 있다. ‘함께’라는 단어. 또한 2018년에 다음과 주제를 선택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이다. ‘일과 가족’ - ‘돈과 인류학’ - ‘길 위의 앎과 삶’ - ‘개인과 공동체’까지. 현재 우리에게 주어(나)와 동사(살다)는 여간해서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면 내 삶을 빛나게 해줄 방법으로 정말 중요한 것은 어떤 ‘부사’를 택할 것인지에 달려있는지도 모르겠다. 함께하는데 어떤 방식으로 함께 해야할까라는 고민이 필요하다.
자유와 역량
사실 시즌 4의 주제에는 숨겨진 단어가 있다. 자유와 역량. 근대적 삶을 살아가면서 개인과 자유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한몸이 되었다. 동시에 개인의 자유로운 활동의 가능성은 그 개인이 속한 공동체의 역량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개인과 공동체라는 말은 동시에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역량(힘)’을 떠오르게 한다. 지난 시즌 ‘환대’의 문제를 다룰 때에도‘환대’란 개인의 문제이기에 앞서 공동체적 역량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논의했었다. 좀 더 풀어서 이야기해보자. 근대에서 우리가 낯선 타자(가족 이외, 시민/국민 이외의 것)를 환영하지 못하는 것은 한 개인의 힘이 약해서라기보다는 환대의 의무와 책임을 개개인에게 돌리는 구조의 영향이 크다. 근대사회란 더 이상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한 사람을 전제하지 않고, 개인들의 집한으로서의 사회를 기본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자유와 공동체의 역량은 항상 상호간에 긴장감을 일으키는 요소를 갖고 있다. 무한적 자유가 허용되는 굳건한 공동체는 상상하기 힘들고, 그 어떤 공동체도 방탕하고 무절제한 개인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엄한 규율을 가지고 강한 집단적 힘을 구성한다고 여겨지는 군대를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된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군대에서는 일반사회보다 더 많은 자유가 제한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강한 공동체에서 개인의 자유는 제한되어야만 할까? 실은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강제적 명령과 복종으로 위계지어진 집단밖에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와 다른 공동체를 경험본 적이 없다.(정말 없을까?) 자율적 윤리로서 구성되는 군대, 모두가 자유로우면서 강한 유대감의 공동체는 어떻게 구성될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어떤 원리로 재구성될 수 있을까? 공동체적 유대감, 네트워크 속에서 상호 구분되지 않으면서도 개별화(특이점)하는 방식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공동체, 속하고 싶으면서 부담스러운
<미하엘 콜하스>의 저자 하이리히 폰 클라이스트(1777~1811)가 살았던 시대는 혁명의 시대이고, 전란의 시대였다. 또한 그는 유럽에서도 가장 늦게 국가의 모습을 형성한 프로이센이 강한 근대적 국가를 구성하려는 시기를 살아왔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에는 하나의 진리를 던져주면서 복종하라고 강요하는 공동체에 대한 저항감이 서려 있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간다는 것,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법을 지킨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특히 우리가 살펴볼 3편의 단편소설(<미하엘 콜하스>, <칠레의 지진>, <싼또도밍고섬의 약혼>)에는 이런 공동체의 구성원리에 대한 고민이 들어 있다. 사람들이 복종하는 권위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국가의 국민은 무조건적으로 법을 지켜야하는지, 권력과 정치는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인가. <칠레의 지진>이라는 작품을 보면 거대한 지진이라는 카오스 속에서 사람들은 기존에 당연하다고 여겼던 신분, 계급, 성별에 따른 고정관념은 순식간에 너무나도 쉽게 무너진다. 그리고 그 상황을 구성하고 있는 현행적 존재들로서의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새로운 윤리를 형성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결코 공동체와 개인이 어떻게 관계맺을 수 있는지를 잊어버리지 않았다.
21세기 이제 혼밥과 혼술이 낯설지 않은 시대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은 홀로 살 수 없다. 이건 존재론적으로도, 정치학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우리는 온라인 오프라인의 이곳 저곳을 기웃거려보지만, 선뜻 함께하기는 쉽지 않다. 쉽게 뭉치기도하지만 또한 쉽게 분해되어버린다. 하지만 뭐랄까. 현재 우리에게 공동체란 '속하고 싶으면서도 부담스러운 곳'이라는 느낌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최후의 보루인 가족(공동체)을 잘 유지하면서 살아보고싶다고 상상하고 노력하지만, 실상 가장 소통하기 어려운 공동체가 가족이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실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죽었음에도 불구하도 이러한 현실을 대신할 수 있는 상상을 할 수 없어서 좀비처럼 돌아다니는 것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스위트 홈으로 표상되는 가족이라고 봐야한다. )
이번 시즌에서 살펴보는 3권의 책들이 모두 국가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이는 국가 공동체의 핵심요소로 작동하고 있는 가족과 일터를 자세히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2018.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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