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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일리치

덕德으로서의 건강

by 홍차영차 2017. 9. 27.

두 개의 분수령과 덕으로서의 건강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는 격언은 소크라테스의 말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 말은 델포이 신전에 쓰여져 있던 경구 중 하나다. 델포이 신전은 가파른 산등성이 위에 세워져 있는데 이곳을 오르다 보면 절로 신에 대한 외경이 느껴지는 곳이다. 고대에 수많은 그리스인들은 델포이 신전에 들려 개인적으로 혹은 공동체적으로 맞닥트린 위기에서 답을 얻었을 것. 그런데 델포이 신전에는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 이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경구가 쓰여져 있다. “Meden agan”. 이 말은 어떤 일에서도 ‘도를 넘지 말라’ 혹은 ‘지나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합리와 이성으로 유명한 아테네인들조차도 ‘오만한hybris 행동’은 결국 파멸miasma을 가져온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신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행동과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는 방식은 언제나 그에 합당한 대가eggue를 치룬다는 생각.

일리치가 <병원이 병을 만든다>의 마지막 장에서 프로메테우스를 언급하면서 ‘의료의 복수’를 언급하는 것은 그리스인들이 삶의 기준으로 삼고 있던 Medan agan을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일리치는 이미 산업시대의 종막을 스케치하면서 산업생산양식과 다른 대안적인 삶의 방식은 프로메테우스prometheus가 아니라 ‘에피메테우스적epimetheus 인간’에게서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각주:1] 다시 말해 오염된 강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은 더 많은 화학약품(기술)을 풀어넣는 방식이 아니라, 더딘 걸음으로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자연스러운 물의 흐름을 만들어 내는 ‘바보’의 행위가 아닐까.


Death of the Dance

일리치는 반기술주의자이거나 근본주의자가 아니다. 다양한 텍스트에서 일리치는 기술과 인간의 자율적 활동이 공존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분명 기술에는 한계가 있어야 하고, 필요하다면 기술의 사용에, 산업생산품에 한계를 정해야 한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술의 과도한 사용과 상품의 과잉을 새롭게 보기 위해서 도구의 사용에 두 개의 분수령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의료에 있어서 1차 분수령[각주:2] 이후 유아 사망률은 줄어들었고, 감염은 위생과 영양 상태의 개선으로 치료/예방되었다. 하지만 의사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기준으로 치료의 효과를 측정할 수 있다고 믿었을 때 2차 분수령을 넘게 된다. 즉 의료 행위와 의료화된 사회 구조 자체가 병을 만들어냈다. 지금이 바로 메덴 아간을 떠올려야 할 때!

죽음이 생물학적이라기보다는 역사적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건강 역시 본능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현실에 대한 자율적이고 문화적인 반응으로 봐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건강은 더 많은 약물과 병원 서비스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 비탄과 고뇌를 실패의 결과로 볼 것이 아니라 회복과 치유의 증거로 볼 수 있을 때 덕으로서의 건강이 가능할 것이고, 건강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성장하고 나이를 먹으며, 치유하고, 고생하고, 죽음을 평화 속에서 기다리는” 능력을 회복하는 일이 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회복은 한 번의 성공이 아니라 지속적인 자기 인식, 자기 훈련, 일상의 리듬과 행동, 식사, 성적 활동를 통해서 형성된다.[각주:3] 그렇다면 건강이란 질병처럼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내가 나와 맺는 관계, 나와 타인(환경)과 맺는 관계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나에게 오는 고통, 질병, 죽음의 경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지 않을까.


2017. 9. 26




  1.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먼저pro 생각하는metheus 자로 기술과 이성, 합리를 대표하는 신이었고, 에피메테우스는 뒤에epi 생각하는 자 혹은 미련한 자로 여겨졌다. [본문으로]
  2. 1차 분수령: 기술/과학의 도입을 통해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문제 해결 2차 분수령: 한계효용을 넘어서는 과도한 사용으로 파괴적인 다른 문제들(인간성 추락 등)이 발생 (이반 일리치, <성장을 멈춰라> 1장) [본문으로]
  3. 일리치가 배움, 이동, 건강에 대해서 말하는 자율적 인간, 무능력에 저항하는 인간은 푸코가 <주체의 해석학>에서 언급하는 ‘법에 예속된 근대적 주체’와 다른 ‘실존 미학’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주체와 상당히 닮았다. <주체의 해석학>에서도 새로운 주체란 단순한 앎의 인식이 아니라 자기 배려하는 인간, 위험을 무릎쓰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주체로 말한다. 여기서 푸코가 강조하는 지금과 다른 주체 형성은 단회적 이벤트 혹은 인식이 아니라 수련을 통한 기술의 획득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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