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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일리치

이반 일리치를 소개합니다

by 홍차영차 2017. 9. 19.

이반 일리치를 소개합니다

<병원이 병을 만든다> 중심으로



‘사람은 좋지만 스타일style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은 모순적이다. 한 사람의 스타일이란 바로 그 사람 자체이기 때문이다. 책도 마찬가지다. 내용은 마음에 들지만 문체가 문제라는 것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문체란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저자의 숙고된 방식이고, 문체 자체가 바로 그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의 한 면을 드러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병원이 병을 만든다Limits to medicine>는 특히 각주가 많고 꼼꼼~한 주석들이 붙어 있다. ^^; 하지만 이런 “주는 이 책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일리치는 전문가의 권위에 의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학자들이 지금까지 책의 쪽 밑 모든 작은 활자에 대하여 행사하여온 독점을 타파”하기 위해서 이런 방식의 글쓰기를 시도했다.




지식인도 아닌 혁명가도 아닌 

일리치는 1926년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고 세상은 점점 더 어수선해졌고, 어느 순간 그는 절반의 유대인으로 ‘진단’받으면서 유랑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에서 크로아티아로, 크로아티아에서 이탈리아로……. 어린 나이에 그가 신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 역시 파시스트 정권 하에서 신분 보장을 받기 위한 방편이었다.

1951년 사제서품을 받을 때 일리치는 촉망받는 사제였고 로마 교황청 국제부 근무가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교회의 관료제도 속으로 들어가길 원치 않았다. 대신 그는 연금술에 대한 공부를 위해 뉴욕을 선택했다. 뉴욕에 도착한 첫날 일리치는 할아버지의 친구들로부터 뉴욕에 급증하는 푸에르토리코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추기경에게 푸에르토리코인 정착지의 교회배치를 청했다. 이렇게 뉴욕에서 이뤄진 푸에르토리코인들과의 만남은 일리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경험이자 유일한 경험이었다. 일리치는 신자들과 삶을 함께 나누면서 엄청난 교세 확장을 이뤄냈다.

이런 활동력을 기반으로 그는 이후 푸에르토리코 대학의 부총장이 되었고, 교육현장에 직접 관여하게 되면서 ‘교육제도’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푸에르토리코 ‘학교교육의 계획’이란 학생의 절반이 의무교육 기간으로 지정된 5년이라는 기초 교육 과정을 마칠 가능성이 1/3이 되게끔 되어 있었다. 평등한 교육을 목표로 하는 의무적인 학교교육이라고 말하지만 이곳에서 일리치가 경험한 것은 “필연적으로 탈락자를 만들어내기 위한 제도”였다.

일리치는 1956년부터 1976년까지 20년동안 남미에 머물면서 지식인이자 혁명가로 활동했다. 그는 멕시코 쿠에르나바카 CIDOC(Center for Intercultural Documentation)이라는 문화교류자료센터를 만들어 활동하면서 교육에 대해, 발전과 성장, 봉사에 대해 질문했다. 하지만 저개발국가를 돕겠다는 마음으로 스페인어를 배우기 위해 이곳에 온 미국의 신부와 수녀 카톨릭 신자들에게 치열한 세미나를 통해서 오히려 미국이나 로마가 어떤 곳인지를 다시 묻게 만들었다. 그는 이 곳에서 지내면서 <학교없는 사회>, <성장을 멈춰라>, <병원이 병을 만든다>를 썼다. 그의 글은 이론적 탁상공론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가 치열했던 남아메리카의 정치투쟁 한 복판에서 써 내려간 현장의 글이었다. 

그는 점점 더 영향력을 발휘하던  CIDOC를 바라보면서, 물론 점점 더 험악해져가는 남미의 정세적 위험도 있었지만, ‘반성장’이라는 스스로가 지키고 싶었던 가치에 대해 고민하면서 10년만에 즐거운 잔치로 함께 문을 닫았다. 이후 그는 독일과 남미를 오가며 그가 현장에서 경험했던 제도화의 문제를 좀 더 근원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한다. 


이반 일리치의 문제 제기 - 무능력에 대한 저항

<학교없는 사회>에서 이반 일리치는 이렇게 말한다. 배움이란 무엇인가? 배움은 학교제도이고 학교의 서비스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인가? 배움은 학교에서 교사를 통한 과정을 받으면 완료되는 것인가? 일리치는 학교제도의 확충과 확장이 학습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반대로 학교제도를 통해서 배움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문제제기 한다.

일리치는 <병원이 병을 만든다>에서 같은 원리로 병원을 비판한다. 건강이란 무엇인가? 다시 말해 건강은 더 많은 병원제도와 의료서비스를 통해서 보살핌을 받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건강이란 스스로 자기 몸에 대한 자율권을 갖는 것이어야 한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모든 고통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 고통과 슬픔, 아픔은 없애야 할 것이 아니라 마주하며 함께 살아가야 할 인생의 조건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통을 줄이는 지혜가 아니라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기술이 아닐까? 병원의 확충, 의료제도의 확산은 결코 질병으로부터 개인과 사회를 보호하지 않는다. 학교가 전 사회를 학교화하는 것처럼, 병원은 삶을 의료화하고 사회 전체를 병원화하고 있다. 병원 속에서 인생 전체를 보내는 것은 결코 건강할 수 없다. 지금은 이런 제도에 물음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더욱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다양하고 디테일한 제도와 서비스에 의존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심리적 불능’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 불과 20~30년 전만해도 1~2km를 걷는 것에 대해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집에서  100m 떨어진 슈퍼마켓도 가지 못한다. 언제부터인가 학교가 아니면 그 어떤 배움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이제 공부하는 법을 넘어서 사랑하는 법, 우정을 만드는 법, 소통하는 법, 게임하는 법까지 학교에서 배워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건강 역시 마찬가지다. 배가 아플 때 ‘엄마손’을 찾았던 것은 이제 상상 속의 이야기가 되었고, 스스로에 대한 건강을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생각은 위법이라는 생각에까지 다가갔다. 건강에 대한 모든 주권이 의사에게 주어졌고, 스스로 건강을 주장하는 사람은 학교제도가 아니라 스스로 공부할 수 있다고 믿는 독학자처럼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즉 ‘비물질적인 요구(건강, 교육, 수송, 복지, 안전)’가 물질적인 것의 수요로 충족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난다. 무능력한 인간의 생산이 강화되고 있다.




임상적 병원병, 사회적 병원병, 문화적 병원병

일리치가 분석하고 있는 병원과 건강을 푸코의 에피스테메episteme, 인식체계라고 불리는 것과 연관시켜 살펴보자. 진실이 진실이 되는 것은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옳은지 그른지,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가 아니다. 진실이 권력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따라 진실이 진실이 되기고 하고, 진실이 거짓으로 되기도 하다. 즉 어떤 지식이 지식으로 인정되는 것은 특별한 장field에서만 이뤄진다.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진실 그 자체나 권력이 아니라 지식-권력이 결합되어 있는 체계이다. 권력이란 지식의 담론으로 나타나고, 지식이란 권력 효과를 드러낼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

일리치가 학교화schooled되었다고 고발하는 건강 역시 이와 같은 에피스테메를 고려할 때 그의 주장이 좀 더 잘 드러난다. 지금 우리가 ‘건강하다’고 여기는 방식, 더 많은 서비스와 제도적 장치에 종속될수록 건강하다는 생각은 근대의 특정한 권력체계와 결합되어 있다. 푸코의 언어로 말하자만 생명권력! 건강, 배움, 복지, 우정, 사랑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 필요하고, 지금 학교, 병원, 고속도로가 위치하고 있는 배치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일리치가 학교화schooled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가치의 제도화, 삶의 의료화를 학교에 가야하는가 아닌가, 병원에 가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의 문제로 축소시켜서는 안 된다. 왜 지금의 학교와 병원이, 이런 형식의 교육과 병원 서비스가 배움과 건강으로 인식되고 있는가에 대해 우선적으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학교와 병원이 배움과 건강에 있어서 독점적 위치를 취할 수 있었는가를 살펴봐야 한다.

임상적 병원병, 사회적 병원병, 문화적 병원병은 의료제도의 확대로 생기는, 다시 말해 의료지식-권력의 결합망에 의해 나타나는 세 가지 차원이다. 위상이 조금씩 다르지만 이 세 가지 병원병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의료 유토피아’란 없다는 것.


리듬, 자유, 건강

이반 일리치는 1992년 암 진단을 받았다. 그의 얼굴 한 편에 큰 혹 하나가 천천히 커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치료법을 찾지 않았고, 정말로 (집중) 치료를 거부했다. <병원이 병을 만든다>에서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그는 ‘고통을 견디는 능력’을 개발하고 연습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각 문화는 고통에 대한 자기기술이 있었다. 즉 “개인이 고통을 참을 수 있고, 질병이나 부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죽음의 그림자를 의미 있게 하는 방법을 갖추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 시대에 ‘고통과 슬픔, 죽음을 해석하는 기술’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는 점을 스스로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의 혹이 자신의 일부이며 그의 인격에 속해 있다고 믿으면서.

결국 나는 건강의 문제를 <호모 큐라스>의 일상 리듬을 찾는 문제, <그리스인 조르바>가 자유에 대해서 언급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살펴보고 싶다. 읽는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중심을 잡고 일상의 리듬을 파악하고 만들어가는 건강의 문제였다. 조르바의 자유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주어진 조건에 절망하지 않고 그 삶 자체를 즐기려고 했던 모습에서 영혼과 육체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몸소 보여주었던 조르바! 자유와 행복은 얼마나 오래 사는가의 문제도 목표를 달성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과정 자체를 역동으로 만들어가는 것.

일리치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능력한 인간’, ‘불구화된 인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신의 몸과 건강에 대해 스스로가 판단할 수 없다면 건강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웃고, 울고, 싸우고, 고통받고, 소리치고, 걷고, 뛰고, 춤 출 수 있는 능력 그 자체가 바로 일리치가 말하는 ‘무능력에 저항하는 인간’, 일상의 리듬을 만들 수 있는 인간, 자유로운 인간이 아닐까.


2017.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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