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 리듬, 우연, 불확실성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1883년 크레타 이라클리온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크레타는 그리스 본토와 달리 터키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는 태어나자마다 독립 전쟁으로 인해 피난생활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자유와 해방은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였다. 물론 그것은 그에게 정치적 의미만을 뜻하지 않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에게 자유는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을 넘어서기 위한 생의 투쟁이었고, 대지의 리듬에 자신을 맞추는 작업이었으며, 안정과 평화라는 허상보다는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이었다. 1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롭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묘비명)
자유, 삶의 리듬과 대지의 리듬을 맞추는 것
지난 주에 읽었던 <호모 큐라스>는 ‘낭송하면서 삶의 리듬을 찾으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양생養生이란 잘 사는 것이고, 삶을 잘 가꾸어 가는 것을 말한다. 양생과 리듬이라!?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물질들도 자신만의 리듬이 있다. 성악가의 소리에 와인 잔이 깨지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이는 단순히 성악가의 소리가 강력하게 크다는 양적 크기의 문제가 아니다. 성악가의 소리와 와인 잔이 질적인 마주침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작은 와인 잔 뿐만 아니라 커다란 다리 역시 이런 마주침이 일어날 때 평상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진폭으로 위험한 움직임을 드러낸다. 자신의 리듬, 공명점이 어디인지 파악해야 하고, 리듬을 증폭해야 할 때와 낮춰야할 때를 알아야 한다.
양생과 건강에 있어서 자신의 리듬을 찾고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리듬의 발견은 하루의 생활에서부터 일년의 스케줄 그리고 평생에 걸친 흐름을 찾아내는 일 모두를 포함한다. 자신의 리듬에 맞게 생활한다는 것은 대지의 리듬과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하다. 개인의 리듬이란 결국 내가 아닌 다른 것과의 마주침 속에서 변주될 수밖에 없고 그런 변화 속에서 서로의 리듬을 맞추어갈 수 있다. 그렇게 조율되는 것이 생의 리듬이다. 만약 혼자만의 리듬을 고집한다거나 자신과 너무나 다른 세상의 리듬에 몸을 강제로 맞추려 시도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망가질 뿐이다.
매일 보는 자갈을 보면서 놀라워 하고 비에도 (모든 사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조르바와 머릿 속에서 잠시 떠오르는 과부 생각에도 괴로워하는 책벌레 두목! 니코스 카잔차키스에게는 육체와 영혼을 뛰어넘는 새로운 십계명이 필요했다. 그가 한 가지 해답을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그는 삶을 수 많은 반복으로 만들면서 끊임없이 시도했다. 2
그에게 ‘바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물리적으로) 더 강하거나 (세속의) 욕망의 없음이 아닌 것 같다. 자유로운 인간은 새로운 세상(타자와 물질)과의 마주침에 두려워하지 않고, 조응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조르바처럼.
자유, 우연한 마주침과 동행할 수 있는 능력
두목이 조르바를 만난 건 아주 우연이었다. 조르바와 크레타에 함께 하게 된 것은 매사를 정밀하게 달아보는 버릇을 가진 사람의 방식이 아니었다. 출항을 앞둔 새벽에 카페에서 골똘히 생각하던 두목 앞에 난데없는 저돌적인 눈으로 자신을 처다보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리고서는 다짜고짜 자신을 데려가라고, 어디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자신을 의탁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수프를 만들어주겠다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두목 자신도 왜 크레타로 가는지 그곳에서 갈탄 채광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자유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면서 조르바와 동행하게 되었다. 두목에게 조르바는 낯선 생물이었으며, 완전한 타자이고, 스승이며 제자이자 동료가 되었다. 일이 진행되어 갈수록 두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갈탄 채광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세계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 뿐이다. 돈이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는 시기는 벌써 지났다.
처음 크레타행을 결정한 것은 자신을 다른 존재로 정의해보고 싶은 두목의 시도였다. 카프카스로 떠난 친구에게 들었던 말, 책벌레. 이제는 더 이상 책벌레가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과 몸을 부대끼며 살아갈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가 만난 것은 새로운 땅 크레타가 아니라 조르바라는 새로운 세계였다. 그는 기존의 모든 앎을 지워버리고, 조르바라는 학교에 입학하여 모든 것을 새로 배우고 싶을 정도였다. 자유란 인생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우연한 사건, 인물, 물질, 환경과 함께 할 수 있는 능력이지 않을까.
자유, 불확실성을 삶의 동력으로
조국 그리스를 축으로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중국, 일본, 팔레스타인, 이집트 땅을 누비고 다녔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인생은 오뒷세우스의 모험 그 자체였다고 말할 수 있다. 74년의 인생동안 그는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았으며, 뭔가를 시도하고 만들려는 과정 중에 있었다. 마치 호메로스의 오뒷세우스처럼. 그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것은 환갑이 지난 1946년이고, <미할리스 대장>이 출간된 해는 1950년 그의 나이 70세일 때였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번역을 하고, 교과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정치적 실천으로 공공복지부 장관을 지내기도 하고, 1945년 환갑을 넘은 나이에 다시 정치에 뛰어 들어 사회당의 지도자로 지내기도 했다. 어떤 면에서 보건 그가 추구한 삶은 안정된 삶과는 거리감이 있어 보인다. 3
생각해 보면 우리가 엄청난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예상 못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 안정되고 확실하고 평화로운(?) 삶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분명 몇 번이나 안정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그 모두를 거절하고 한 길 앞도 알 수 없는 모험을 매번 다시 시작했다. 우리의 생각과 달리 그에게 있어 삶의 동력은 인생의 예측할 수 없음, 불확실성에 있는 것 같다.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삶이란 그에게는 ‘죽음’과 같은 것이지 않았을까.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이상한걸까 아니면 우리가 뭔가 잘못 생각하는 걸까. 인생에서 안정되고, 확실한 것이 있는가? 100% 보장한다고 아무리 소리쳐 봐도 우리가 경험한 인생은 예상과 다르게 펼쳐질 때가 훨씬 더 많다. 그리스 비극에는 하마르티아harmartia라는 말이 있다. 번역해 보면 과오, 실수라는 말인데, 이는 인간의 능력이나 조건과 관계없어 이루어지는 일이다. 잘 생겼던지 아닌지, 키가 크든지 작던지, 돈이 많은지 적은지, 힘이 센지 약한지에 상관 없이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 운명-죽음. 모든 사람이 과녁의 중앙을 맞추려고 한다. 일부러 낮은 점수를 맞추려는 사람은 없다. 그리스 비극이 전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 바로 이럴 때 조르바의 철학이 필요하다. 두목의 저울은 이 때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사실 언제나 행동과 열정으로 움직였던 조르바와 생각만 많아서 ‘계산기’라고 놀림을 받았던 두목, 이 두 사람은 고국의 해방을 위해서 몸 바치고자 하는 열정과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고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크레타 출신 니코스 카잔차키스 자신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찾은 해답은 세상에는 아무런 정답이 없다는 사실 뿐이다. 자유란 주어진 정답에 자신의 인생을 맞추는 것이 아니다. 모두에게 공통으로 주어진 질문-죽음이라는 운명에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스스로 대답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볼 때 오뒷세우스적 삶,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살아온 삶은 새로운 영감을 준다. 아무런 길이 보이지 않고, 사면이 완전히 막혔다고 느겼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꼈을 때조차 그는 살아갈 방법을 고안하고, 여행을 하고, 새로운 실험을 시작했다. 바로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는 문제가 해결된 상태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살아가는 힘은 그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 그리고 이런 여정동안에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알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이런 점이 그에게는 삶을 흥미롭고 재미있게 그리고 격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들지 않았을까
2017. 08. 29
- 흥미롭게도 1883년은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일어나라”고 외치면서 인류의 해방을 꿈꿨던 마르크스가 대지에 묻혔던 해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 반복은 수 많은 다른 활동 속에서 가능하다. 움직이고, 사건을 만들어야 반복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분명 차이 있는 반복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 반복 속에서 자신의 스타일, 리듬을 발견하고 만들어야 한다. [본문으로]
- “내 삶을 풍부하게 해준 것은 여행과 꿈이었다. 내 영혼에 깊은 골을 남긴 사람이 누구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꼽을 것이다.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혼에 깊은골을 남긴 사람 중에 가장 먼저 꼽은 사람이 바로 호메로스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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