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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스토리

<들풀> 1

by 홍차영차 2015. 11. 12.


생명 자체에 달라붙어 있는 ‘죽음’

- 루쉰 <그림자의 고별>, <희망>, <길손>, 왕후이 <절망에 반항하라> 4장  -



‘무쇠방’에 대해 이야기할 때, 루쉰이 보여준 태도는 뭔지 모르게 모호한 면이 있었다. “희망은 미래 소관이고 절대 없다”라고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글을 쓴다니. 희망을 갖고 있다는 말인지 아니면 자신은 믿지 않지만 그저 도와주겠다는 것인지. 그가 보여주는 삶의 태도는 항상 이런 식이었던 것 같다. 계몽주의자처럼 보이지만 콕 집어서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애매한 면이 있고, 개인주의자 같지만 항상 사회문제를 놓지 않는 루쉰의 독특한 면모. 이처럼 <외침> 서문에 쓰여진 ‘희망’에 관한 혼돈스러운 루쉰의 말은 <들풀>에 와서  조금 더 구체적인 해석의 단초를 주고 있다. 특히 <들풀>의 전체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죽음’에 대한 루쉰의 생각을 따라가다보면 왕후이가 해석한 것처럼 루쉰이 ‘절망과 희망 모두를 왜 허망한 것’이라고 말했는지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루쉰이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생명, 들풀처럼 짓밟히고 썩는 것

<들풀>을 모두 쓰고 머리말을 쓴 것은 1927년이었다. 머리말에는 4.12사변으로 ‘비분에 찬’ 루쉰의 심정이 글로 잘 나타나 있다. 하지만 <들풀> 머리말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루쉰이 생각하는 ‘죽음’에 대한 의미다. 루쉰에게 삶은 그 자체가 죽음과 부패로 연결된다. 생명의 흐름 속에 죽음과 부패가 놓여 있다고 봐야 한다. 

머리말에서 ‘죽음을 기뻐하고 이로써 살아있었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과거의 자신에게 매몰되지 않고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일들을 계속해서 하는 것에 의미를 두었음을 알려준다. 또한 ‘죽은 생명이 썩었음에 기뻐한다’는 말은 그가 한 일들이 허공 속에 맴도를 실체 없는 메아리가 아니라 살아있는 행위였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루쉰은 이를 ‘공허하지 않다’고 말한다.

<외침> 이후 계속해서 써온 그의 글들은 모두가 하나의 ‘들풀’이었다. ‘뿌리가 깊거나 아름답지 않지만’ ‘생명의 흙 위에서 주검의 피와 살을 양분 삼아’ 어떻게든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큰키나무’처럼 거대하지는 않더라도. 들풀은 ‘살아있는 동안 짓밟히고 베이고, 결국에 썩겠지만’ 바로 이것이 들풀이 살아가는 방식이고 루쉰이 생각하는 생명의 의미였다. 죽지 않고, 썩지 않는다면 모두 공허할 뿐이다. 

루쉰은 썩어져가는 중국 사회에 내던져졌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실체 없이 사라지지 않았다. 루쉰은 그곳에서 들풀처럼 짓밟혔지만 지속적으로 논쟁하고, 투쟁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쟁취했다. 이런 모습에서 루쉰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했을 것이다.


지젝, 왕후이, 알랭바디우, 세신빈터


생명과 죽음, 밝음과 어둠, 절망과 희망 그 사이 어딘가

왕후이는 <들풀>을 시대적인 사건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루쉰에 대한 하나의 완성된 철학체계로 보고 있다. “탁월하고 성숙한 사상가의 작은 감상도 장엄한 사유의 큰 건물을 지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루쉰이 바라보는 ‘죽음’은 ‘모든 사람은 죽는다’라는 숙명적 태도와는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왕후이가 말한 것처럼 루쉰은 ‘죽음을 세상 너머에 있는 초월적 절대물’로 보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루쉰에게 죽음은 삶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생명 과정’과 단단하게 달라붙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림자의 고별>에서 그는 세상에 실재하는 것을 오로지 ‘암흑’으로만 보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한낱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림자’는 암흑에서도 광명 속에서도 존재할수 없다. 그림자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밝음과 어둠” 사이를 방황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천당과 지옥이 아니라 “무지(無地)”에서 방황하는 것을 택한다. 이처럼 루쉰은 자신을 그림자와 같은 ‘절망적 존재’로 바라보고 있다.

절망적 존재로서의 ‘자아’란 무엇인가? 루쉰이 보기에 “자아가 이 세계에 온 것은 스스로 바라서가 아니라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이 세계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상에 던져진’ 루쉰은 부패한 세상을 초연하게 바라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는 결국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만 파악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 세상을 혐오한다고 하더라고 결국 ‘나’는 자연의 일부, 사회의 일부, 문화의 일부, 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눈감으려 해도 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루쉰이 ‘절망’에서 출발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세상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갖고 있는 ‘나’는 결과적으로는 ‘나’를 부정적으로 보게 한다. 루쉰은 이렇게 ‘죄책감을 가진’ 태도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글에는 고통과 쓸쓸함이 알게 모르게 드러나고 있다. 희망적인듯하면서도 불안과 긴장이 <들풀> 속에 나타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희망>을 보면 루쉰의 모호한 삶의 태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 자체가 썩은 세계의 일부임을 알아버렸기에 그는 자신의 ‘내부’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몸 밖”에서이다. 하지만 몸 밖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확언할 수 없다. 우리가 희망을  탐색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으로 유한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희망은 허망한 것이 되고 만다. 아무리 ‘희망을 방패삼으려 해도 방패 뒤쪽도 공허 속의 어둔 밤’이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희망과 절망에 대한 루쉰의 독특한 관점은 여기에서 나타난다. 이처럼 ‘희망이 허망하다면 절망도 허망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루쉰의 글과 삶에서 완전한 희망이나 완전한 절망으로 들어갈 수 없는 이유이다.


반항하는 인간

식인하는 중국 사회에서 태어나고, 어찌되었든 ‘팔고문’을 공부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근간을 만들었던 루쉰. 이렇게 루쉰은 절망의 자아에서 출발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루쉰은 ‘절망에만’ 빠져 있지는 않았다. 그는 그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준칙’을 만들어갔다. 앞서 말했듯이 생명이란 계속되는 죽음의 연속일 뿐이다. 그리고 그 죽음은 외재적으로 존재하는, 알 수 없는 불가해한 것으로 루쉰에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루쉰은 매 순간마다 ‘죽음’을 확인하고, 그 죽음이 썩어가는 것을 보면서 ‘실재’로서 자신이 살아있음(생명)을 확인했다.

<길손>에서 루쉰은 자신에게 ‘살아있음’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길손은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모른다. 또한 그가 어디서 출발했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있다. 그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먼 길을 걸었다는 것’과 ‘계속해서 걸어갈 것’이라는 점이다. 무덤을 향해서.

“매번 이름이 달랐”다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루쉰이 절망과 희망, 밝음과 어둠 사이를 방황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가지각색으로 보였고, 그렇게 오해받기도 했다. 개인주의자, 자유주의자, 계몽계몽주의자라는 이름으로. 

늙은이가 길손에게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 가라고’, ‘나아간다고 끝까지 갈 수 있을지 보장할 수 없다’고 말했을때, 길손은 그래도 ‘가야 한다고’ 말했다. 왔던 곳으로 되돌아 간다는 것은 ‘과거의 나’로 돌아가라는 것인데, 루쉰에게 과거의 나는 벌써 죽고 썩어버렸기에 돌아갈 수 없다. 이는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모두 불가능한 일이다. 루쉰에게는 매번마다 죽고 세워지는 새로운 ‘나’만이 있을 뿐이다. 길손은 ‘발이 망가지고 여러 군데를 다쳤지만’ 하나도 다치지 않은 원래의 모습을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다른 사람의 피도 원치 않는다. 그는 현재 자신의 모습 그대로 걸어가기를 원했다. 예전처럼 조금 더 걷는다면 필요한 ‘물’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말한다. 


<들풀>에서 루쉰은 특히 동정과 보시를 멸시한다. 가식적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동정과 보시 자체가 사람을 난장이로 만든다고 말하면서. 루쉰은 계속해서 왜소해진 인간으로 동정과 보시를 하기보다는 차라리 홀로 논쟁하고 싸우기를 택했다. <길손>에 나오는 늙은이와 여자아이가 보여주는 동정은 결국 자신들의 허위를 덮는 데에 쓰일 뿐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동정때문에 스스로의 위치를 자각할 수 없게 된다. 반항할 수 없는 인간으로 남게 된다. 알베르 카뮈는 <반항하는 인간>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반항에는 침해자에 대한 반감과 동시에 인간 자신의 어떤 부분에 대한 즉각적이고도 전적인 긍정이 있다.”라고. 절망적 존재에서 출발하는 루쉰은 세상과 동떨어져 홀로 고독하게 지내지 않았다. 그곳에서 멈추지 않았다. 루쉰이 자신에게서 ‘절망적 자아’를 대면했을때, 역설적으로 루쉰은 ‘자신의 생명에 비장하고 격렬하면서 화려하며 온 세계의 충만한 형태’를 더 찬란하게 부여할 수 있었다.


2015.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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