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미신이 함께 판치는 세계
: 반지성주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나
: 자폐적 경험과 열린 감각
: <감각의 주술> 1, 2장 발제
chatGPT, Gemini, Claude와 같은 최첨단 과학기술로 무장한 AI가 우리 생활을 바꾸고 있다. 젊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노인 세대까지 이제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보다 AI와 대화하는 것을 더 편하게 여긴다. 최근에는 Agent AI라는 메타의 MUSE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단순히 대화를 나누는 것을 넘어서 뮤즈는 최상의 여행 일정을 잡고 비행기 표까지 구매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흥미로운 건 이렇게 최고의 과학적 지식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사회에서 비과학적이면서 비이성적인 일들이 전 세계적으로 큰 힘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타로와 MZ 무당을 찾아가는 것이 일종의 유행이 되어 있고, 공부를 잘 하는 것보다는 춤을 잘 추는 것이 더 능력이 있는 것이 되었다. 또한 여기저기서 다양한 명상과 소마틱 프로그램들이 넘쳐나고 있다. 첨단과학의 AI와 미신이 함께 판치고 있는 이 카오스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감각의 주술>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공지글에도 썼듯이 <감각의 주술>은 상당히 광범위한 영역을 다루고 있다. 일단 내용적으로 보면 <감각의 주술>은 마술, 샤머니즘, 애니미즘에서부터 시작하여 후설과 메를로퐁티의 현상학 그리고 문자 문화와 구술 문화까지 다룬다. 뭘 다루려고 이렇게 다양하면서 상호적으로 모순되어 보이는 영역을 가져온 걸까.
우리는 오직 인간 아닌 존재들과 접촉하고 어우러짐으로써만 인간이 된다
슬프게도 우리 문화가 지구 생물권과 맺는 관계는 어느 모로 봐도 상호적이거나 안정적이지 못하다. 문명의 과잉으로 인해 미시간 숲이 수백만 평씩 사라져 되살릴 수 없게 되고 매달 생물 수백 종이 별종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문화에 만연한 병폐의 수준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면역 기능 장애와 암 발생이 점점 심각해지고, 심리적 고통, 우울증이 널리 퍼지고, 자살이 갈수록 늘어나고, 멀쩡해 보이던 사람이 뚜렷한 이유 없이 가족을 살해하거나 대량 살인을 저지르는 일 등이 급격히 증가한다. (<감각의 주술> 52쪽)
생태학을 이야기하지만 저자는 지구를 보호해야 된다는 당위로 접근하지 않는다. 현재 우리가, 내가 겪고 있는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 방향으로서 ‘마법의 생태학’을 제시한다. 개인적인 불안과 우울, 심리적 고통과 소외뿐 아니라 신체적인 장애와 암 발생의 원인들이 바로 비인간 존재와의 접촉과 교류가 막혔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인류사 전체를 가져오면서 그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인간들은 “다성적인 풍경과 맺어온 상호성”에서 인간으로 존재해 왔다는 것.(15쪽)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는 우리 주변의 풍경들과 자연세계를 대상화하면서 “온갖 추상에 사로잡힌 채 오직 자신만을 되비추는 인위적인 기술들에 주의를 빼”았겼다는 것. 2026년 “우리는 인간-너머의 감각과 감성의 매트릭스 속에 육체적으로 속해 있음을 너무나도 쉽게 잊어 버렸다.” (53쪽) 문명의 과잉이 위에 인용한 위태로운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주장이다.
무속과 주술사 vs 예술가와 정신분석가(종교인)
젊었을 때 마술공연을 했던 저자는 인도네시아와 네팔 여행을 통해서 자연 세계와의 관계가 우리의 의식과 감각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를 직접 경험했다. 흔히 우리가 미개한 지역이라고 여기는 곳에는 주술사, 샤먼들이 있고 그들의 의례나 치료 행위를 우습게 여긴다. 하지만 저자는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주술사가 “인간 공동체와 더 넓은 생태적 장 사이의 매개자”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인간과 인간-너머 세계”를 이어주는 뛰어난 여행자이자 전략가, 협상가라는 것을 깨달았다.
샤머니즘이나 우리나라의 무속을 떠올려보자. 알수 없는 식물을 태워서 연기 - 아마도 향정신성 약물 - 를 피우고 춤을 추다가 어느 순간엔가 인간이 아닌 듯한, 살아있는 인간이 아닌 듯한 감각과 정신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샤먼이나 주술사는 “자신의 보편화된 지각의 논리로부터 일시적으로 벗어날 때라야 다른 종들의 방식에 따라 그들과 관계 맺기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주술사나 무당은 “자신이 속한 문화를 규정하는 지각적 경계”를 쉽게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저자가 묘사하는 주술사와 샤먼은 흡사 현대의 예술가와 정신분석가(종교인)처럼 보인다. 주술사의 의례와 치료 의식은 “인간-너머의 장이 보내는, 의미로 가득한 노래, 울음, 몸짓”이다. 샤먼들은 비인간 존재들과의 경험들을 이끌어내거나 반대로 비인간 존재의 비언어적인 현출을 비언어적인 춤이나 예언, 그림을 통해서 표현하는 존재들이다.
정신적 관념들과 신체적 지각들 사이의 분열
최첨단 과학이 넘실대는 현대에 왜 미신과 주술과 같은 반지성을 추구하는 것이 많아졌을까? “인류학계가 비인간적 자연에 대한 주술사의 깊은 순응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결과다. “더 넓은 자연 공동체에 관한 내밀한 지식 없이” 마구잡이로 “토착 주술사의 치유법”을 모방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그저 “하나의 증상을 다른 증상으로 맞바꾸거나 질병 발생의 장소를 이리저리 옮기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코페르니쿠스 이론의 전복 … 본래의 방주, 즉 지구는 움직이지 않는다.” …… 그는 이 원고에서 우리의 과학적 신념과 자연적 경험 사이의 지속적인 충돌로 인해 과학적 세계관은 심각한 불안정성을 지닌다고 설명한다. …… 그리하여 우리의 지적 신념과 가장 기초적인 감각의 확신 사이, 즉 우리의 정신적 관념들과 신체적 지각들 사이에 심대한 분열이 일어났다. (데카르트가 정신과 몸을 철학적으로 분리하게 된 까닭은 분명 이미 존재해온 이러한 상황 때문이었다. 새로이 등장한 코페르니쿠스적 세계관을 유지하려면 이성적 지성은 경험하는 몸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했다.) (81쪽)
이런 질문을 발견하게 되면서, 저자는 다시금 “자연과의 긴밀한 연결”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한 “어떻게 서양 문명은 (자연과의) 감각적 상호성에서 멀어졌”는지를 질문한다. 여기에 대한 중요한 연결점이 바로 현상학이다.
메를로퐁티의 현상학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에서부터 출발한다. ‘갑자기 웬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이란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현상학은 “단일하며 전적으로 확정할 수 있는 객관적 현실이 존재한다는 근대적 전제”에 강력한 문제를 제기했다. “객관적 현실”에 문제 제기를 했다는 것은 데카르트로부터 칸트로 이어지는 철학뿐 아니라 이 철학의 토대로 작동하는 코페르니쿠스-케플러-칼릴레오-뉴턴의 과학의 세계까지 무너뜨리겠다는 급진적 사상이다.
후설의 현상학을 한마디로 말하면 “사물 자체로 돌아가자”라는 것으로 울고, 웃고,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살아있는 경험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 제기에서 과학의 세계란 후설의 생활 세계Lebenswelt를 바탕으로 추출된 2차적인 것이다.
후설의 현상학을 소개하고 있지만 저자가 주술과 샤먼과 관련해서 적극적으로 가져온 것은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이다. 왜냐하면 메를로퐁티는 후설의 초월론적이고 관념론적인 지향을 떨쳐내면서 ‘몸의 상호성’을 지각의 핵심으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은 곧바로 살아있는 몸과 생동하는 세계 사이에서 이뤄지는 상호성에 주목한다. 몸이 존재하는 것은 생동하는 세계와 연계 덕분이지만 세계 역시 몸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낸다. 한 마디로 메를로퐁티는 경험하는 자아로서 주체를 신체적인 유기체와 동일시하면서 출발한다.
지각의 상호성
메를로퐁티의 관점에서 보면, 지각이란 수동적인 감각이 아니라 “생동하는 모든 유기체가 필연적으로 세계에 자신을 맞추고 조직하도록 이끄는 열린 활동”이다. 창조력과 수용력의 역동적 혼합이라고 할까. (92쪽)
간단하게 보면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에서 지각은 “몸과 사물(생동하는 세계) 사이의 상호적이며 역동적인 참여”로 이뤄지는 것이고, 또 다른 편에서는 “지각 행위 속에서 몸의 다양한 감각 체계(오감)도 상호적으로 참여”한다.
몸과 사물과의 상호성이란, 한마디로 “내 몸과 이를 둘러싼 존재들 사이에서 계속 이어지는 교류”이고, “내가 사물들과 이어가는 일종의 고유한 대화, 나의 언어적 인식 아래에서 펼쳐지는 끊임없는 비언어적 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각은 단순히 지각하는 것도, 지각당하는 것도 아니다. 지각이란 “내 고유의 리듬과 사물들 고유의 리듬, 즉 고유의 음색 및 질감 사이의 조율”이라고 봐야 한다.
메를로퐁티가 언급한 공감각도 이러한 조율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즉 지각 perception은 몸의 모든 감각이 함께 작동하고 활약하는 협력적 활동이라는 것. “우리의 원초적, 선개념적 경험은 본질적으로 공감각적”이라는 사실이다.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 - 구술 문화와 문자 문화
저자는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을 공부하면서, 메를로퐁티가 묘사한 지각의 상호성이 “수많은 토착 문화적 구술 문화의 세계관과 놀라울 만큼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해 있다. 즉 “구술 문화 공동체에서 주로 노래, 기도, 설화로 구현되는 언어는 단지 다른 인간과 대화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간-너머의 우주와 대화하고, 주변을 둘러싼 땅 및 하늘의 힘과의 상호성을 갱신하고, 문명화된 사고방식으로 보면 순전히 무감각하고 비활성적인 존재처럼 보이는 것들과도 친족적 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해 기능한다.”(121쪽)
다시 말해서 “다중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발화되는 구어는 인간과 주위를 둘러싼 대지 사이의” 상호성을 강화하며 부각하는 반면, 서양 문명에서는 언어가 자연과의 상호적 “삶을 부정하거나 무디게 만들어 감각적 경험에 대한 엄청난 불신을 조장하고, 동시에 감각적 현출들 뒤 혹은 너머에 숨겨진 추상적 관념의 영역을 드높이는 역할을 해 온 듯”하다. 구술 문화에서 문자 문화로의 이행과 그 영향을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
마술사나 현상학자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상상력이라 부르는 것은 애초부터 감각 자체의 한 속성이다. …… 물론 공연에서든 더 넓게는 이 세상 속에서든 어떤 마술도 아예 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온갖 설명과 분석으로 무장한 그들은 그저 속임수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밖에 보지 못한다. …… 예측하기 어려운 것을 경멸하고 냉철한 객관성에 높은 가치를 두는 문화적 담론에 고무된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감각이 현상에 참여하는 것을 막으려 든다. (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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