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센느 신드롬은 시대적 증상 이란 글에서 리센느 신드롬의 원인 중 하나로 원이의 얼굴표정을 들었다. 그런데 왜 나는 빙구같이 웃는 모습이나 입도 가리지 않고 하품하는 모습, 그리고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원이의 얼굴표정을 보면서 함께 웃고 기분이 좋아질까. '안녕하세요원이입니다잘부탁드립니다' 채널을 보다보면 이런 댓글이 많다. "빙구처럼 웃는 원이를 보고 있으며 무장해제가 된다."
그냥 예쁜 얼굴때문인가. 일면 그런 점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원이가 에스파의 카리나 혹은 원터보다 월등한 미모를 가지고 있는냐하면 그렇지는 않다. 신기한 것은 요즘 예쁜 아이돌로 꼽히는 장원영, 카리나, 설윤, 유나 - 장카설유의 얼굴표정과는 분명 다른 뭔가가 있는것처럼 느껴진다. 카리나를 보면 (실물로 본 적은 없음) '와, 정말 이쁘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생겼을까' 놀란다. 하지만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거나, 그동안의 긴장감을 무너뜨리면서 무장해제되는 느낌은 아니다. 그렇다면 왜 원이의 웃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무장해제가 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될까. (덕질과 분석 사이를 오락가락 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주시길. -.-;) 들뢰즈/가타리가 <천개의 고원>에서 언급한 '얼굴성'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살펴보자.
얼굴성이라는 추상적인 기계는 언제 작동하기 시작하는가? … 수유를 하는 동안에도 얼굴을 통과하는 모성의 권력, 애무 중에도 연인의 얼굴을 통과하는 열정의 권력, 군중 행동 안에서조차 깃발, 아이콘, 사진 등 우두머리의 얼굴을 통과하는 정치의 권력 … 이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닌 경제와 권력 조직의 문제이다. … 권력의 어떤 배치물들은 얼굴의 생산을 필요로 하고, 권력의 어떤 배치물들은 그렇지 않다. 원시 사회를 고려해본다면, 얼굴을 통과하는 것은 거의 없다. 원시 사회의 기호계는 기표작용적이거나 주체적이지 않고, 아주 다양한 표현의 형식들과 실체들을 이용하며, 본질적이고 다성적이고 몸체적이다. (들뢰즈/가타리 <천의 고원> 336쪽)
우선 알아야 할 점은 "우리는 아무 표정이나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얼굴표정이라고 하면 아주 개인적인 자기 표현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사실 인간의 얼굴표정은 아주 사회적이며, 공동체의 영향 속에서 생산된 것이다. 우리는 상황마다 그에 맞는 얼굴표정을 생산하기를 요구받는다. 선생님에게 혼날 때의 표정, 사랑하는 연인을 만날 때의 얼굴표정, 아이에게 젖을 물릴때의 어머니의 얼굴! 놀랍게도 국가마다 공동체마다 얼굴 표정 - 얼굴근육의 사용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유럽 사람들의 표정, 우리나라의 얼굴표정, 일본의 얼굴 표정, 아프리카나 남미의 얼굴 표정을 흡사한 듯 보이지만 다르다. 얼굴표정을 만들 때 사용하는 근육 자체가 다르다. 각각의 공동체가 일종의 권력으로서 공동체가 서용하는 얼굴표정을 생산하도록 압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점은, 현재 우리가 너무나 자연스럽고 본성적이라고 생각하는 얼굴(표정)은 문자의 발명과 함깨 등장한 자기 인식과 연결되어 있다. '얼굴'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문자(언어)'의 발달과 맞물린 내면의 복잡성과 연결되어 있다. 문자의 탄생과 함께 나타난 '자아'가 없었다면 얼굴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자기 인식이 두드러지면서 속마음과 다른 얼굴표정 생산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내면의 충동 그대로 말한다면 세계는 금방 멸말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얼굴표정들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그 사회의 "아주 특별한 권력배치물"(들뢰즈/가타리)을 통해 생산된 것이다.
바로 여기에 원이 얼굴의 특이성이 있다. 대다수의 다른 아이돌들이 노래를 부르거나 예능에서 보여주는 미소는 뭔가 불편하고 부담스럽다. 그 얼굴들에 작동하고 있는 경제적이며 정치적인 권력이 뚜렷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아이돌로서 당연하게 보여줘야 하는 가식적인 미소들! 그런데 이들과 다르게 원이의 방긋 웃는 표정은 '기존의 권력배치물'들을 부서버리는 듯한 힘을 갖고 있다. 크게 하품을 하면서 입을 가리지 않는 얼굴, 장난치고 싶어 어쩔줄 몰라하는 빙구같은 웃음,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향해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랑해라고 말하는 솔직한 면모들. 그 순간에 얼굴에 작동하고 있는 긴장감을 한순간에 무너뜨린다.
분명 원이의 얼굴표정에도 "권력배치물"들이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리센느 신드롬이 있기 전의 모습들에는 근심걱정하는 모습들도 나오고,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에 불안해 하는 표정도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이 얼굴표정에는 뭔가 '원시적인 머리', '머리를 겸비한 얼굴'처럼 보인다. (개가 웃는다거나 고양이가 심술맞은 표정을 한다는 것은 거의 인간적인 관점의 투영일뿐이다. 동물들은 표정을 갖지 않는다. 원시 사회의 인간들철머 얼굴이 아닌 머리를 갖고 있을 뿐이다.)
경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얼굴의 주권적인 조직화에서 벗어나려 하는 얼굴성의 특징과 이 특징 위에서 갇히고 그것을 다시 붙잡고 그것의 도주선을 봉쇄하고 그것을 다시 조직화하는 얼굴 그 자체 사이에서 벌어지는, 언제나 다시 시작되는 싸움이다. (들뢰즈/가타리 <천의 고원> 357쪽)
들뢰즈/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얼굴해체하기'를 말한다. 기존의 권력배치물들이 생산한 얼굴과 표정이 아닌 자신의 독특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얼굴의 탄생을 위해서 얼굴해체하기가 필요하다고. 21세기는 하나의 자아를 가지고 죽을 때까지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의식적 자아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언제나 해체되면서 다시 성립하는 것으로서의 무의식적 주체(라캉), 리좀적 자아를 구성하는 것이 필요한 시기다. 그러기 위해서 현재 자신의 얼굴을 생산하도록 하는 "권력배치물"들을 인식하고, 해체하면서 다시 자신만의 얼굴을 생산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얼굴표정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목소리가 방출되는 곳이다. 우리의 얼굴이 권력의 전쟁체, 끊임없이 권력을 쟁탈하려는 장소가 되는 이유다.
내가 원이의 얼굴 표정을 보면서 무장해제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긴장을 한순간에 풀어버리는 마법의 표정처럼 작동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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