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막염이네요. 눈에는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안약과 인공눈물 처방해드릴테니 최대한 눈 비비지 마세요."

'결막염이네요'라는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기분이 좋아졌다. 지난 2주동안 '상상 속에서 커져갔던 불안'은 곧바로 사라졌다.
오른쪽 눈이 희뿌옇게 보였던 것은 지난 시즌 새벽낭독 마지막 즈음(7/1일 전후)이었다. 금방 좋아지겠지 별 생각없이 며칠을 보냈는데 상태가 좋아지지 않았다. 새벽낭독도 없고, 더워서 러닝도 못하니 신체 상태가 나빠서 그럴거라고 핑계를 댔다. 정말 오랜만에 테니스를 다시 시작했고, 러닝도 했다. "역시 운동을 하고 신체상태가 좋아지니 눈도 잘 보이네." 실제로 눈 상태가 좋아지는 듯 했다.
하지만 하룻밤이 지나고 다시 이틀, 삼일이 지나도 뿌옇게 보이는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다. "요즘 스마트폰을 너무 많이 봐서 그런가?" 며칠 푹 자면 해결되겠지. 또 다른 핑계를 만들면서 꾸역꾸역 지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2주일이 지나도 살살 간지러운 눈상태는 그대로였다. 특히 불안했던 건 오른쪽 눈으로 보면 사물이 점점 더 희뿌옇게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아, 드디어 오른쪽 눈도 백내장 수술을 해야하는건가." 2년 전쯤 겪었던 백내장 수술이 떠올랐다.
사실 처음 오른쪽 눈이 희뿌옇게 되었을 때 머릿속에서는 곧바로 '백내장 수술'이 떠올랐다. 2년 전 병원에 갔을 때는 왼쪽 눈으로는 거의 사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기에 첫날 진료를 하고 이틀뒤 바로 수술을 했다. 사실 별로 큰 수술은 아니었지만 백내장 수술을 받고 회복하기까지 꽤 큰 공포와 불안을 맞봤다. 수술 전후 눈이 보이지 않게 되면 어떻게 하지? 더 이상 텍스트를 볼 수 없다면 어떻게 살아야할까. 눈이 회복되지 않으면 혼자 사는건 불가능한거 아닌가. 이전에 읽었던 텍스트들을 떠올리면서 살아가야 하나. 수만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물론 수술은 잘 진행되었고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전과 같은 일상을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눈이 뿌옇게 보이면서 "이번에는 오른쪽 눈인가. 병원에 가면 또 곧바로 수술 하자고 하겠지." 상상 속에서는 벌써 백내장을 확신하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이렇게 '상상 속에서 병명을 확신'하고부터 삶 전체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청소하기도 싫고, 텍스트 읽는 것도 싫고, 운동하는 것도 싫어졌다. 단순히 기분만 그런것도 아니다. 실제로 주위 사물들이 뿌옇게 보이다보니 다른 감각들에도 영향을 주었다. 매일 마시던 커피도 별로 마시기 싫어졌고, 맛있는 음식도 땡기지 않았다. 음식을 만드는 것도 귀찮아지니 몸 상태는 점점 더 나빠졌다. 심지어 텍스트를 봐도 제대로 이해되는 것 같지도 않고 산책을 해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뿌옇게 보이는 눈 상태가 여전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2주를 미루다가 오늘 안과에 다녀왔다. 더 이상 미룬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다. 오늘 가면 곧바로 백내장 수술을 하자고 하겠지. 그렇게 불안한 몸뚱아리를 붙잡아 병원에 도착했다. 다행히 환자가 많지 않아 곧바로 진료를 봤다. 진료 결과를 듣고서는 깜짝 놀랐다. 백내장 수술을 한 것은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 눈이었다는 사실!
웃기지 않은가? 불과 2년도 되지 않았는데 기억이 뒤바뀌었다. 오른쪽 눈이 침침하고 뿌옇게 보였으니, 난 당연하게도 지난번에 백내장 수술을 한 눈이 왼쪽 눈이라고 생각했다. 집에서 왼쪽 눈만으로 볼 때는 깨끗하게 보였고, 오른쪽 눈만으로 볼 때는 침침했다. "이제 오른쪽 눈까지 백내장 수술을 해야겠구나!"라는 어처구니 없는 상상 속에서 2주간을 보냈던 것!
실제 눈 상태와는 상관 없이 내 상상 속에서 2주간을 참으로 불안하고 우울하게, 또 공포스럽게 보냈다. 실제 일어났던 수술사실조차도 왜곡하면서조차 나 스스로 불안과 공포심을 극대화시켰다는 것. 안과의사의 "결막염이네요."라는 말과 "지난번 수술한 눈은 오른쪽입니다"라는 두 문장에 마음이 편해졌고 풍선처럼 부풀어올랐던 불안과 공포심도 사라졌다.
지난 2주동안 내 몸과 마음을 병들게 했던 것은 실제 눈의 상태가 아니다. 상상 속의 확신은 몸과 마음에 영향을 줬다. 상상 속 확증은 점점 더 강해져고, 불안에서 공포로 나아갔고 우울감은 점점 더 커졌다. 마음만이 아니다. 실제 몸상태 역시 나빠졌다. 일찍 잠이 들어도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었고, 산책하고 러닝하는 것조차 무리라고 느껴졌다.
물론 결막염보다 백내장이 무섭다. 하지만 일상 생활을 무너뜨린 것은 백내장도 결막염도 아니다. "상상 속의 불안"을 계속해서 키워갔기 때문이다. 상상 속에 있을 때는 이게 상상인지 진실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나의 생각이던 어떤 면에서는 백퍼센트 상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문제와 직면( face to face)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번 백내장 수술을 할 때도, 병원에 가기 전의 1~2주가 가장 불안하고 두려웠다. 백내장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나서는 도리어 마음은 아주 편해졌다. 세계가 이렇게 보였던 것은 내 눈 때문이었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실제 직면하면 별로 큰 문제가 아닌데 우리는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기 힘들어한다. 왜냐하면 자신만의 상상 속에서 스스로 불안을 점점 키워가기 때문이다. 친구와 싸운 뒤, 부모님과 싸운 뒤 화해하기 어려운 것은 상대방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가 상상 속에서 상대방을 악마화하기 때문일 확률이 크다.엄청나게 부풀어 오른 풍선을 보면 두려운 마음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실상 풍선 속에는 별다른 게 없다.
혹시라도 상상 속에서 키우고 있는 풍선이 있다면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그 앞에 서서 풍선과 대면해보자. 작은 풍선일 경우 스르륵 바람이 새나갈 것이고, 엄청나게 부풀어오른 풍선이라도 펑 하는 요란한 소리만 울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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