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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도 응시를 경험할까 (feat. 의태와 회화)

by 홍차영차 2025. 11. 30.

 

6, 7, 8강 전반부까지만 보면 라캉의 응시는 니체의 자폐적인 자기인식의 반영이나 사르트르의 시선과 상당히 흡사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8강 후반부에서 라캉은 응시를 의태와 연결시키면서 마치 실재인 시선이 동(식)물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말한다.

 

라캉이 주목한 것은 카이유와의 논문이다. 카이유와의 논문은 동물들의 모습/무늬가 주변의 형태에 적응해서 바뀌는 점을 주목하는데 카이유와는 이를 적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즉, 카이유와 이전까지 나비의 모습/무늬가 주변처럼 바뀌는 것은 잡혀먹지 않기 위해서 적응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카이유와는 적응해서 무뉘가 바뀐 나비들과 그렇지 않은 나비들이 잡혀먹히는 빈도가 별 차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천적을 피하기 위해서 주변의 모습과 비슷한 모습/무늬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메카니즘 속에서, 어떤 이유로 의태가 발생하는가.

"현상적인 차원에서 조망을 통해 내가 나 자신을 그림 속에 얼룩으로 위치"시킨다는 <세미나11>의 텍스트만으로는 그 의미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다른 2차 서적<라캉읽기>에 있는 내용을 가지고) 쉽게 말해보면 천적을 피하기 위해서 적응한 것이 아니라 주변 배경의 이미지들과의 조응을 통해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이미지는 매혹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라캉은 "배경을 바탕으로 스스로 얼룩덜룩해지는 것"을 응시라고 말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응시(구조) 속에서 사물을 보는 것처럼, 동(식물)들도 전체적인 배경 속에서 자신을 위치시킨다는 것! 문제는 응시가 이렇게 동(식)물들에게까지 작동하는 것이라면 응시=구조라는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라캉은 마치 실제적인 응시가 전우주적으로 펼쳐져 있는 것처럼 응시라는 개념을 확장시키고 있다.

 

현상적인 차원에서 조망을 통해 내가 나 자신을 그림 속에 얼룩으로 위치시키게 되는 경우라고밖에 설명될 수 없는 사태들이 있습니다. 의태라는 사태가 바로 그것입니다. 153

...... '아칸시페라'라는 형용사를 붙여 부르는 '바다대벌레'라는 이름의 작은 갑각류에 관한 것인데요. 그것이 동물과 식물의 중간쯤 되는 이끼벌레가운데 정착할 때는 무언가를 모방하게 되는데, 그것은 ...... 이 이끼벌레라는 동물에게 있는 얼룩입니다. ...... 바로 이 얼룩진 형태에 그 갑각류가 적응하는 겁니다. 그것은 스스로 반점이 되고 그림이 되어 자신을 그림 속에 기입해 넣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바로 이것이 의태의 근원적인 원동력입니다. 154

...... 카이유와가 <메두사와 그 일당>이라는 소책자에서 이 점을 매우 통찰력 있게 지적했다 ...... 하지만 그러한 사태들이 실제로 확인시켜 주는 바에 따르면 의태에는 적응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의태는 대부분의 경우 우머런 효과가 없거나, 효과가 있다 해도 적응이라 추정되는 결과와는 정반대로 작용합니다. 반면 카이유와는 실제로 의태 활동이 펼쳐지는 주요 차원이라 할 수 있는 세 가지 항목을 강조 하지요. 변장, 위장, 위협이 그것입니다. 155 (<세미나 11> 8 선과 빛)

 

실제로 주체가 자신을 그림 속에 끼워넣는 차원은 바로 이와 같은 영역에서 나타납니다. 의태는 배후에 있는 '그 자신'이라 불릴 수 있는 것과 구별되는 무언가를 보여줍니다. 의태의 효과는 엄밀하게 기술적인 의미에서 위장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배경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얼룩덜룩한 배경을 바탕으로 스스로 얼룩덜룩해지는 것이지요. 그것은 정확히 인간의 군사 작전에서 사용되는 위장술처럼 작용합니다. 155 (<세미나 11> 8 선과 빛)

 

 

여기서는 의태와 응시의 문제를 문자와 정신공간의 측면에서 이의를 제기해보려고 한다.

정말 동(식)물들의 의태를 응시의 결과라고 볼 수 있을까? 라캉은 <세미나11>에서 동물이라고 말했지만 의태는 식물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정확한 사례인지 좀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들뢰즈가 <천개의 고원>에서 들고 있는 난초와 말벌의 공생) 더 나아가 라캉은 "동물 수준에서의 의태 현상이 인간의 예술이나 회화와 유사하다고까지 말하면서 회화(예술)에 대해서 정의를 다른 관점에서 제기하고 있다. 동물의 의태를 인간의 회화와 연결하기 전에 우선 주목해야할 것은 라캉 정신분석으로 보면 동식물들은 정신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라캉은 응시를 처음 이야기하는 6강부터 응시의 선재성을 언급한다. 내가 보기 전에 응시가 먼저 있고, 보여지는 것 가운데서 내가 본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응시의 선재성이란 라캉 정신분석학에서 자연스럽게 언어적 구조로서의 무의식과 연결된다.(고 봐야한다.) 응시가 발생하는 것은 의식을 가진 존재에게 발생한다고 봐야한다. (구술성의 인간들에게 니체와 사르트르, 라캉이 감지하는 응시는 없다. 라캉식으로 표현해보면 종교적 응시, 마법적 응시만 있을 뿐이다.) 의식을 가진 인간에게 응시가 나타나게 된다면 회화의 문제도 간단하게 이해된다. 응시의 포기와 철회를 요구하는 회화가 있고, 또 반대편에는 응시를 드러내는 회화가 있다. 독창성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히 회화(예술)은 응시를 포기하거나 철회해서는 안 되고, 응시를 드러내야한 한다. 응시를 보여주지 못하는 회화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동물들과 식물들에게 이런 응시를 똑같이 적용할 수 없다. 동물들이 전체적인 배경 속에서 자신을 얼룩으로 배치하는 것은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느끼는 응시라기보다는 이미지 자체의 힘과 조응하는 변화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이 또한 응시라고 부르고 싶다면 상상적 응시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문자와 정신공간의 측면에서 회화를 비롯한 예술은 문자의 발명 이후, 좀 더 가까이는 데카르트의 선언 이후에 벌어진 자기 내부의 충동과 행동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예술(회화)에서 드러나야 하는 것은 라캉이 말하는 실재의 부분으로서 대상a이다. 그림을 보면서 평상시에는 볼 수 없었던 의식의 세계에서 배제되고 무시되었던 세계가 드러나는 것, 이것이 예술(회화)이다.

라캉이 응시를 동(식)물에게까지 무리하게 확장하고 있지만 라캉의 회화론은 문자와 정신공간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언제나 "그림 속에는 응시와 같은 무언인가"가 나타나야 한다. 어떤 그림 속에서든 화가 저마다의 특징적인 어떤 것, 화가가 마주친 응시의 현존을 느끼게 된다. 물론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는 두 가지가 이중적으로 배치된다. 자신이 마주한 응시를 보여주지만 보여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림을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이 이해하는 것을 발견하고 싶어한다. 또한 어떤 그림을 보는데 그 그림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전혀 없어서도 안된다. 한편으로는 "보고 싶니? 그럼 이걸 보렴!"하고 보는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을 그려준다. 이게 바로 응시의 진정효과, 아폴론적 진정효과다. 또한 어느면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 응시의 진정효과와 응시를 요구하는 효과의 배치. 사실 회화는 이 두 가지를 어떻게 배치하는가에 달려있다.

문자와 정신공간의 측면에서 보면 회화(예술)은 기본적으로 응시를 요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면에 100% 응시가 드러나는 작품은 예술이라고 할 수 없다.(?) 어떤 면에서 예술은 신경증자들이 경험하는 실재계의 부분이기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동물 수준에서 관찰되는 의태 현상들이 인간의 예술이나 회화"(156)라는 라캉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저는 다음과 같은 테제를 제시해볼까 합니다. 즉 확실히 그림 속에는 언제나 응시와 같은 무엇인가가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화가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으며 ...... 어떤 일정한 양식의 응시를 선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결국 여러분은 화가 저마다에 특징적인 어떤 것을 은연중에 보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응시가 현존한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겁니다. ......

그림의 기능은 응시와 관계가 있습니다. ...... 화가는 자신의 그림 앞에 서게 될 사람에게 적어도 그림의 한 부분에선 "보고 싶니? 그럼 이걸 보렴!"이라고 요약될 수 있는 무언가를 제공합니다. 화가는 눈에 양식거리를 주면서도 그림을 보는 이엥게 마치 무기를 버리듯이 응시를 포기하도록 권유합니다. 바로 여기에 회화가 발취하는 아폴론적 진정효과가 있습니다. ...... 157

문제는 회화의 한 양상 전체가 이러한 장으로부터 떨어져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표현주의 회화를 말하는 것인데요. 표현주의 회화를 특징짓는 것은 그것이 응시가 요구하는 것을 일정하게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무엇인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58 (<세미나 11> 8 선과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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