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강의 & 세미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by 홍차영차 2021. 8. 23.

삶의 조건으로서 거짓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소련과 공산주의, 도피와 망명, 자아비판과 비밀경찰 - “프라하의 봄”을 떠오르게 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이번에 읽을 때는 정치적, 군사적,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의식과 의미라는 무거움 속에서 자라난 토마시, 테레자, 프란츠, 사비나의 담담하지만 고군분투처럼 읽혔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짐으로 여기며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몰라 당황하고, 함께 하고 싶어하지만 또한 홀로 있고 싶어하며 살아가는 모습들! 소설 첫 문장부터 ‘영원회귀적 삶’을 이야기하는 밀란 쿤데라의 마음이 살짝 느껴지기도 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마지막 부분에 짧은 이야기가 나온다. 함께 비행기를 탔다가 토끼로 변한 토마시를 건네받으면서 너무 행복해서 눈물을 흘리는 테레자. 이 한 편의 동화같은 이야기는 토마시와 테레자가 함께 살기 시작한 순간부터 마지막까지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보여준 것 같다. 그런데 내 눈에 작은 토끼는 힘을 잃어버린, 늙어버린 토마시가 아니라 더 이상 의식과 의미에 얽매이지 않으며 삶을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모습으로 변모한 토마시와 테레자로 보인다.

소크라테스 이후 인간은 ‘의미’의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16세기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문장으로 인간을 정의하기 시작했고, 18세기 칸트는 이성을 법정에 세우며 무너뜨릴 수 없는 인간 조건으로 이성의 토대를 세웠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이성과 의미만으로 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 빙산의 일부로 드러난 의식처럼 이성과 의미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일면이라는 것을. (의식의 밑바닥에 무의식이 있다면 이성과 의미의 바닥에는 무엇이 있을까?) 의미의 늪에서 빠져나오기란 그리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어디서나 의미를 찾으면 무의미의 세상을 노래부르는 것에서조차도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의미로부터 해방을 외칠수록 역설적이게도 의미 없는 세계에 대한 공포는 심해진다. 우리는 더욱더 의미에 매달리게 된다.

이제 의미와 목적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무거운 중력으로, 삶을 짐으로 만드는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 바로 이때 니체는 인간에 대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간이란 자신에게 일어나는 충동을 그 자체로 전달할 수 없는 것을 자신의 독특성으로 갖고 있는 존재라고. 말과 의식으로 옮겨놓는 순간 생생했던 충동과 매혹적인 향기는 사라지고 말라비틀어진 왜곡된 오류만이 남는다. 의미의 세계로부터 탈출하여 어떻게 충동을 충동 그 자체로 전달할 수 있을까.

밀란 쿤데라의 질문은 19세기 니체의 질문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언제부터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왔을까? 그런데 의미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의미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무의미의 세계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어떤 모습일 수 있을까?

 

 

0. 슬품의 형식과 행복의 내용

 

그들은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에 맞춰 스텝을 밟으며 오고 갔다. 테레자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안개 속을 헤치고 두 사람을 싣고 갔던 비행기 속에서처럼 그녀는 지금 그때와 똑같은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484쪽)

 

형식(form)은 단순히 외형만을 말하지 않는다. 형식 자체가 발생시키는 특성이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가장 큰 비밀은 상품이라는 형태(form)에 있다고 말했고, 근대적 인간을 생산하는 형식(form)으로 푸코는 법(기준, 규칙)에 예속된 인간을 언급했으며, 이반 일리치가 보기에 학교는 탈락자를 양산하는 기괴한 양식(form)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슬픔은 형식이고, 행복이 내용’이라는 말은 소포클레스의 마지막 비극 작품에 나오는 미다스와 실레노스의 대화를 떠오르게 한다.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 묻는 미다스 왕의 질문에 “인간의 부를 경멸하는” 실레노스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계속 다그치는 미다스 왕을 향해 “하루살이에 불과한 덧없는 존재”라고 일컬은 뒤, 마침내 “태어나지 않은 것이 가장 좋은 것”이고 “가능한 한 빨리 죽는 것이 그 다음 좋은 것”이라고 대답한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고, ‘가능한 빨리 죽는 것이 차선’이라니! 비관도 이런 비관이 없을 것 같은 답변이다. 하지만 고통과 죽음을 삶 가까이에 두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추구했던 그리스인들을 생각해보면 실레노스의 대답에는 어떤 비밀이 들어있는 것 같다. 그에 대한 대답은 아낙시만드로의 철학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낙시만드로스에 따르면 우주는 순수한 1차 물질, 원소로 존재했다. 하지만 세계가 형성되면서 개체가 존재하기 위해서 원소와 원소가 결합해야 했다. 즉, 존재가 탄생하기 위해서 우주적 질서, 우주적 도덕이 망가져야 했다. 존재는 그 탄생 자체가 부정의로부터 출발했으며, 그렇기에 우주적 도덕을 회복하기 위해서 죽음, 해체는 필수적이다. 한 마디로, 아낙시만드로스에게 “탄생은 범죄이며, 성장은 일급의 강도질”일 뿐이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우주적 질서에 어떤 해로움도 주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태어났다면 가능한 한 빨리 원소로 돌아가 우주적 질서를 회복하는것이 마땅하다는 주장.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필멸의 존재(mortal)로, 태어나면서부터 시한부의 인생을 살아간다. 영원히 살아가는 인간은 없으며, 영원히 살아간다면 인간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존재 자체가 가지고 있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또한 어떤 의미를 갖고 살아갈 수 있을까.

놀랍게도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교묘히 전도시키며 인간의 삶에 무한한 긍정을 불어넣는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이 인간에게 부러워하는 단 한가지가 바로 죽음(mortality)이다.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존재이기에 인간의 삶은 모든 순간이 아름다답고, 고귀할 수 있다는 역설이 가능해진다. 반면에 영원히 죽지 않으며, 죽을 수 없는 존재인 신의 어떠한 행위도 고귀하다고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다.  슬픔의 형식이기 때문에 행복의 내용이 가능하다는 신묘한 철학!

 

 

1. 의식이 겸손해져야 하는 시기

 

카레닌은 영혼과 육체의 이원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혐오감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테레자는 그의 곁에 있으면 기분이 좋고 편안했던 것이다. 461쪽
카레닌이 개가 아니라 인간이었다면 틀림없이 테레자에게 오래전에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봐, 매일같이 입에 크루아상을 물고 다니는 게 이제 재미없어. 뭔가 다른 것을 찾아줄 수 있겠어?” 이 말에는 인간에 대한 모든 심판이 담겨 있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때문이다. 그렇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라고 테레자는 생각한다. 463쪽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성적’이라 점을 자랑스러워한다. 깊이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주변의 동물들 - 강아지 고양이, 닭, 돼지, 소 - 들과 인간을 구별하는 기준점으로 ‘이성의 능력’을 떠올린다. 유사한 것에서 동일한 것을 발견하고 그로부터 좀 더 복잡한 논리들을 추론해 내는 능력! 바로 이런 능력으로 우리는 100층이 넘는 고층 빌딩도 짓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친구와 실시간으로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며, 지구 밖으로 나가서 지구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자신을 다른 것과 분리해서 바라볼 수 있는 능력, 인식의 능력에 대한 과한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삶이란 논증이 아니라는 것, 비웃고 탄식하고 저주하려는 ‘충동’ 속에서 살아가는 것임을 잊어버린 것 같다. 사실 이성, 의식, 논증이란 충동의 의지에 씌어진 가면에 불과할 뿐인 것을!

 

거짓말이 가능한 세상

말이 ‘낱말’로 바뀌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기록의 역사 - 이야기의 역사가 아니라 - 가  나타났던 것처럼, 문자의 탄생과 함께 우리는 집단으로부터 분리되는 ‘자아’로서의 나를 구분할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떠돌아다니는 생각들, 사물들과 동물들 혹은 다른 사람들을 마주치면서 발생하는 생각들과 자신의 생각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아라는 것은 기억들의 집합, 표상의 집합으로서 정신이라는 개념 속에서 가능하다. 문자가 발생하고, 자신의 생각을 적을 수 있게 되면서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저장된 생각들과 다른 생각들을 비교하면서 배제하거나 통합할 수 있게 되었다.

의식을 가진 사람이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내면성은 인간이 가진 독특성이자 어려움이다. 문자를 배치하는 기술이 발달(문장, 문단, 장, 절, 색인 등등)함에 따라 우리의 내면성 역시 더욱 더 복잡하게 작동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고 저장할 수 있으며, 또한 쉽게 지울 수 있다는 생각에까지 도달했다. 의식에서 파생되는 속마음을 갖게 되면서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직시하기 어려워졌다.

속마음을 가진 것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순간적인 화로 인해서 관계가 무너지는 것보다는 합리적인 방식에서 조금 뒤에 이야기를 하자고 하거나 사회적인 질서를 생각하면서 폭력적인 행동이 제지하는 것은 아주 큰 장점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속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바로 인간 사회에서 거짓말이 가능한 세계, 거짓말이 일상이 된 사회가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점점 상대방의 의도와 진심을 따지게 되고, 이 사람이 말로 약속한 것을 잘 지킬 것인지 매순간 불안에 떨면서 살아가고 있다. 점점 더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 말과 행위를 일치시키는 문제에 대해서 무능력해지고 있다.

 

질병이 된 의식

거짓말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신체와 사유의 평행론을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직관적으로 신체와 사유가 하나임을 알고 있다. 생각으로는 분명히 용서를 했지만, 신체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결코 해결된 것이 아니라는 것, 지랄 총량의 법칙! 신체와 정신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해소되지 않은 감정들은 언제 어느 순간에건 터질 수밖에 없다. 내면성의 복잡성이 증가하면서 우리는 표상, 관념들의 집합으로서의 정신이 우리의 신체 그리고 타자의 신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다. 내가 외부 사물에 대해  관념을 갖는 것은 나의 신체와 그 물체와의 물리적인 부딪힘으로 가능하다. 갖난 아기가 외부와의 어떤 접속도 없다면 그 아이는 어떤 관념도 형성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타자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만져보고 냄새맡고 바라보고 먹어보면서 나는 그 물체에 대한 하나의 관념을 형성한다. 다만 근본적으로 우리는 그 물체 자체를 알 수는 없다. 우리는 자신의 오감과 신체를 통해서 타자를, 자기 스스로를 파악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인식한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라는 하나의 필터를 통과해서 파악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의식되는 세계는 피상적 세계, 기호의 세계, 일반화되고 범속해진 세계에 불과하다. 따라서 의식된 모든 것은 평범하고, 희미하고 상대적으로 어리석고, 일반적이며, 기호, 무리의 표식이 된다. - 의식된 모든 것에는 근본적으로 커다란 타락, 위조, 피상화, 일반화가 결합되어 있다. 결국 의식의 증가는 위험한 것이다. 가장 의식적인 유럽인들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은 심지어 의식이 하나의 질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즐거운 학문> 339쪽)

 

이런 배경에서 니체는 ‘의식은 하나의 질병’이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니체는 질병을 없애버려야 할 것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통증에 “개”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그렇게 부른다. 즉 제거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지만 함께 가야할 친구 같은 존재로서의 질병! 의식을 갖게 된 인간이 ‘의식(자아)’에 대해 바라봐야 하는 관점이 바로 이렇지 않을까. 질병과 함께 살아가지만 결코 질병이 나를 압도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태도, 그렇다고 그 질병을 없애겠다고 자신의 존재까지도 위협하도록 하지는 않는 것!

우연찮게도 토마시와 프란츠는 외과의사와 유능한 교수로 의미의 세계를 생산하는 지식인 사회에 속했고, 반대로 사비나와 테레자는 화가와 사진가로서 무의미의 세계, 충동의 세계에 속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간단하게 말해보자면 의미의 세계에 속한 프란츠와 토마시가 무의미의 세계를 구축해온 사비나와 테레자에게 구원받는 이야기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2. 이해 가능한 거짓말과 이해 불가능한 진리

 

“… 앞은 완벽한 사실주의 세계였고, 그 뒤에는 무대장치의 찢어진 캔버스 뒤편처럼 뭔가 다른 것, 신비롭고 추상적인 것이 보였지.”
“앞은 파악할 수 있는 거짓이고, 뒤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였지.”
테레자는 어떤 교수라도 학생의 얼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막힌 집중력을 발휘하며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사비나의 모든 작품이 예나 지금이나 실은 항상 같은 것을 말하며 두 주제, 두 세계의 동시적 만남이자 마치 이중노출로 탄생한 사진 같다는 것을 확인했다.  106쪽

 

사비나에게 “인생이란 이해 가능한 거짓말을 뒤집어 쓰고, 이해 불가능한 진실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이었다. 무의미의 세계를 몸소 살아왔던 테레자는 사비나의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삶이란 전할 수 없는 것을 전하려는,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시도라는 것을. 그럼에도 시도하는 것, 그것이 삶이고 예술이다.

의미의 세계가 막 탄생하려던 시기에 그리스인들은 이 이중의 세계를 아주 신묘하게 표현했고, 생활 양식으로 만들었다. 이성의 세계를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충동의 세계를 아무런 틈도 발생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리스 신화 속에서 개인과 공동체, 정신과 육체 사이에는 어떠한 틈도 발생하게 않았다.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리스인들은 외부 세계에 대한 반응으로 ‘정신(자아, 속마음)’이 아니라 ‘신(화)’을 발명해냈다. 그리고 자신들이 창조한 것이 발견된 것이라고 믿으면서 살았다. 분명 그것은 거짓(?)이지만 살아가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거짓이었다. 

개인의 정신과 자아의 과도한 의식이 지배하던 19세기 니체는 그리스 신화(비극)를 넘어서 다른 해석을 제시해야만 했다. 낙타와 사자를 넘어 어린아이 되기! 여기서 어린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의식을 갖기 이전의 어린아이가 아니라 “영원한 어린아이”, 성숙을 겸비한 어린아이를 말한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거짓이면서 실재’ 그리고 “성숙은 놀이에 임하는 어린아이의 진지함을 되찾는 데 있다”(<선악의 저편>, 94쪽)고 말한 이유이다.

초기 니체는 비극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생각과 행동 사이의 간극은 신화로 메우기에는 너무나 깊고 넓었다. 스스로를 이성적이라고 여기는 근대인 누가 “탄생은 범죄”이고 “존재 자체가 불의”라는 말을 긍정할 수 있을까. 니체는 이성, 정신, 의식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이 간극을 메울 필요가 있었다. 

단순하고 하찮은 장남감을 실재로 만드는 어린아이의 눈과 손이 필요하다. 살아가기 위해서 세계를 단순화할 필요가 있다. 다만 우리는 살아갈 때 현실을 단순화한다는 사실 자체를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취하는 전제들을 가능한 대안이 아니라 최상의 대안으로 믿어야 한다. 하지만 어린아이처럼 이전의 장난감을 아무런 상처를 남기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리고 새로운 장남감을 다시 실재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니체에게 진리는 창조되는 것이어야 하고, 동시에 창조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창조된 것을 발견된 것으로 믿어야 한다.

 

삶의 조건으로의 거짓과 영원회귀

원시의 삶으로 돌아가자고, 의미 이전의 세계로 복귀하자고 말하지 않는다. 그럴수도 없다. 우리의 세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다. 이성과 의식, 의미와 목적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어린아이의 눈과 손’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진리는 언제나 창조되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동시에 창조된 것을 발견된 것으로 믿어야 한다.

영원회귀적 시각이 필요한 시점이다. 영원회귀적 관점이란 지금의 생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해도 지금의 선택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의 대답이다. 여기에 ‘예스’라는 답이 올 수 있으려면 단순한 하나의 선택이 아니라 삶이라는 놀이, 주사위 놀이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경우들을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다른 지층에서 보면 영원회귀적 시점은 자기를 꽁꽁 둘러싸고 있는 동일성의 잣대를 무너뜨리는 것, 동일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이성 혹은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실은 신체를 둘러싼 다양한 충동들의 경쟁을 통해서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환영일 뿐이기 때문이다. 영원회귀의 사유가 돌연히 임했다는 것, 영원회귀의 체험을 긍정한다는 것은, 자기를 구성했던 모든 충동들, 그리고 그 충동들이 구성했던 것, 구성할 것, 그리고 구성하는 모든 것을 경험하는 일이 된다. 영원회귀의 삶이란 정말로 “역사의 모든 이름들”이 자신임을 체험하는 삶이고, 삶의 모든 이름들을 긍정하는 삶이다.

그렇기에 영원회귀는 ‘있는-그대로-존재하기’의 필요조건으로 ‘선재’를 선언한다. 나는 태어나고, 성장하고, 죽고, 묻히고, 사라지지만, 나의 강도들, 충동들은 언제나 앞서 있었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세계에 도래한 모든 것, 도래하는 모든 것, 언젠가 도래할 모든 것’에 적용되는 하나의 기호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고, 삶의 모든 것들에 대해 긍정할 수 있다.

 

3. 무의미의 세계에서 살아가기 - 고귀한 행위에 앞서 고귀한 자가 있다

무의미의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호메로스적 인간으로 복귀하는 게 아니다. 반대로 자신의 충동을 제대로 살피면서 그 욕망을 긍정하면서 살아가는 방식이다.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말로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기준들을 살피는 것이고, 눈치를 살핀다는 것이다. 무의미의 세계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눈치를 살피기보다 자신의 욕망 자체에 집중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다.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고귀한 자는 고귀한 행위를 하는 인간이 아니다. 고귀한 자는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자이다. 여기서 역전이 생긴다. 고귀한 행위가 먼저 있고, 그에 부합하는 고귀한 인간이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고귀한 인간이 먼저 탄생하고 그가 하는 모든 행위들은 ‘고귀한 행위’가 된다. 단순한 역전 같지만 여기서 모든 것이 바뀐다. 무의미의 세계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그는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자이고, 자신의 힘을 찬미하고, 자신의 취향에 어떤  부정도 갖지 않는다. 무의미의 세계에 사는 사람은 자신의 행위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에서 귀족들은 자신들을 ‘우리 진실된 자들’이라고 불렀다. 어디에서든 도덕적인 가치 표시가 먼저 인간에게 붙여지고 나중에 비로소 파생된 방식으로 행위에 붙여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 고귀한 종류의 인간은 자신을 가치를 규정하는 자라고 느끼기 때문에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가치를 창조하는 자다. 그는 자신에게 속하는 것을 존중한다. 그러한 도덕은 자기에 대한 찬미다. 충만한 느낌, 넘쳐흐르려고 하는 힘의 느낌, 고도의 긴장에서 오는 행복감, 베풀어주고 싶어하는 풍요로움의 느낌이 그런 도덕의 전경에 드러나 있다. (<선악의 저편> 260절)

 

지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의미, 가치, 목적에만 의지한다. 문화가 만들어 낸 의미와 목적이 삶에서 너무나 커져서 다른 사람들의 눈치만을 보는 너무나 왜소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의식’이 겸손해지는 시기가 다가왔다고 말하는 이유다.  고귀한 행위가 무엇인가 묻기 전에 고귀한 인간이 어디서 오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서슴치 않고 자신의 행위에 찬미를 더할 수 있는 자, 자신과는 다르지만 자신의 가치를 보여주는 다른 강자를 사랑하고, 진정한 적을 존경할 수 있는 자, 그가 바로 고귀한 인간이다.

 

 

4. 세계는 텍스트다

스피노자와 니체 모두 개인과 공동체가 대립되지 않음을 주장했다. (둘 다 ‘정신의 발견’ 이후에 개인과 공동체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지를 고민했던 것 같다.) 스피노자에게 단독자란 없다. 어떤 개체도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부분들의 합성이 새로운 복합개체로 나타난다. 니체 역시 개인을 공동체와 분리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니체는 힘의지라는 개념, 이해할 수 없는, 표현할 수 없는 개념을 통해서 개인의 해체를 극한까지 몰아갔다. 니체는 개인과 타자의 관계를 말하면서 자신에게서부터 출발하지 않고, 개체의 특징을 자신을 둘러싼 타자들의 영향으로 생산된 것으로 말한다.

 

한 사물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특징들의 전체 조합에 부분으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부분이 없다면 전체의 성격이 완전히 변한다. 그렇다면 이유야 어쨌든 결과적으로 우리는 단 하나의 전체만을 말하는 셈이다. 이 전체는 서로 독립적으로 보이는 두 종류의 특징에 의하여 성립되는 것이다. (<니체, 문학으로의 삶>,159쪽)

 

니체와 밀란 쿤데라 모두 이성의 세계, 객관성의 세계, 언어화 될 수 있는 세계, 수치화가 가능한 세계로 변화하면서 배제된 것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역설적으로 니체가 보기에 개체의 핵심은 본질이라고 보이는 특징들이 아니라 그 특징들을 둘러싼 ‘잉여들’에 있다. 아무런 쓸모가 없어보이는 휴지, 소수점 이하의 숫자들, 아무런 먹을 것도 주지 못하는 잡초와 벌레들. 고등학교에서 단 한 번도 말해본 적 없는 수많은 친구들, 길을 걸으면서 스쳐 지나가는 타자, 한 번도 들어갈 일 없는 무수한 빌딩과 지금 이후로 절대 볼 수 없는 흘러가는 물과 바람! 지금 내가 보여주는 특징들, 내가 나임을 드러내는 독특성은 역설적이게도 이런 사소한 것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구성된다. 우주에 아무것도 없다면, 내 주변에 아무도 없다면 내가 나임을 말할 수 있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주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흘러온 모든 것들이 바로 나를 통해 하나의 법칙, 필연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내가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결론으로 성급히 내달리면 안 된다. 니체는 개체의 부분이 전체의 일부로서 1/n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1/n은 전체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부분과 전체는 결국 하나다. 우리는 언제나 “단 하나의 전체”만을 말하는 셈이다.

 

세계를 하나의 텍스트로 바라보자는 것은 ‘존재는 생성과 변화’라는 니체의 관점을 적확하게 관통하는 것 같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언제든지 지금까지의 설명을 버리고 새로운 해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아니 새로운 대사와 사건으로 지금까지의 관점이 바뀌는 것을 즐겁게 생각한다. <유주얼 서스펙트> 마지막 장면에서 케빈 스페이시가 절뚝 절뚝거리며 걷다가 똑바로 걷는 모습에 소름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 한 장면으로 이전에 2시간동안 몰입해서 본 영화 전체를 거꾸로 다시 보는 즐거움을 선사받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과 세계도 이처럼 바라볼 수 있다면 삶의 매 순간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단 하나의 배치와 사건만으로 이전에는 절대로 다른 의미를 줄 수 없을 것 같던 과거(사건)가 다르게 변할 수 있다. 운명을 즐기라는 ‘아모르 파티’란 바로 이런 창조적 삶을 살아가라는 응원가로 들린다.

문학은 언제나 실패한다. 아니 실패할 수밖에 없다. 문학은 언제나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시도이고, 드러낼 수 없는 것을 드러내려는 실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도하는 것, 그것이 문학이다. 그것이 삶이지 않을까.

가벼움과 무거움, 무거움과 가벼움을 넘나들면서 언제나 새로운 실험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영원회귀적 삶이지 않을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