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귀한 자는 어디서 오는가
: <선악의 조건> 8장, 9장
<선악의 저편>의 부제는 ‘미래철학의 서곡’이다. 니체식으로 보면 강자, 고귀한 자, 귀족, 자유정신을 소유한 자들의 도래를 요청하는 노래다. 제목을 보면 1장 ‘철학자들의 편견에 대하여’로 시작해서 2장 ‘자유정신’, 3장 ‘종교적인 것’으로 전반부를 마무리한다. 4장 ‘잠언과 간주곡’은 제목 자체에서 드러나듯 아주 짧은 경구를 나열하면서 정신을 정화(?)하고 뭔가를 준비하는 장이다. 이어서 5장 ‘도덕의 박물학’, 6장 ‘우리 학자들’, 7장 ‘우리의 미덕’이 나온다.
이제 9장 ‘고귀함이란 무엇인가’로 넘어가면 될 것 같다. 그런데 8장 ‘민족과 조국’에서 니체는 고귀한 인간으로 가는 마지막 단추로 갑자기 바그너 이야기를 꺼낸다. 바그너 음악으로부터 시작해서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을 이야기하고, 동시적으로 독일적인 것과 비교되는 프랑스, 영국, 유대, 로마적인 것을 이야기한다. 조금은 생뚱맞게 느껴진다. 니체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마지막 9장 ‘고귀함이란 무엇인가’에서 니체는 아주 직설적으로 ‘고귀한 인간’, ‘주인도덕’과 ‘노예도덕’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니체는 이런 고귀한 인간이 어디서 나타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마지막 가파른 정상을 앞두고 지금까지 올라온 길을 돌아보고, 또 위험하지만 피할 수 없는 길을 걸어갈 마지막 힌트를 주는 것 같다. 독일적인 것, 바그너의 음악, 그리고 민주주의에 논의들을 통해서.
나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마이스터징거> 서곡을 처음 듣는 기분으로 다시 들었다. … 이 작품 속에는 다양한 생명의 즙과 힘, 다양한 계절과 풍토가 녹아 들어가 있다! 그것은 때로는 고대적이고 때로는 이국적이며 떫고 미숙한 느낌은 준다. … 또한 거기에는 최상의 의미로든 최악의 의미로든 독일적인 어떤 것, 독일식의 다채로움과 모호함과 무궁무진함이 있다. <선악의 저편> 240절
바그너는 19세기 프랑스인들보다 모든 점에서 보다 강하고 보다 대담하며 보다 가혹하고 보다 높은 것을 창조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눈에 띌 것이다. 이는 바그너의 독일정 성격에서 비롯되는 영예이며 우리 독일인이 프랑스인보다도 훨씬 더 야만에 가깝다는 사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256절
고귀한 인간은 저 멀리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순적인 부분의 극복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바그너의 이야기부터 살펴보자. 니체는 바그너 음악에 ‘다양한 생명의 즙과 힘, 다양한 계절과 풍토’가 녹아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의 음악에는 프랑스와 다른 ‘보다 강하도 대담하고 가혹한’ 부분이 있다고. 즉 바그너의 음악은 현대적이고 장중하고 엄숙한 동시에 “야만적”인 면모를 갖고 있다. 현대적이고 야만적이기에 그의 음악에서의 자기 극복이 가능하다면 미래 철학의 서곡으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독일인들을 ‘심오하다’고 특징짓던 시대가 있었다. … 독일의 영혼을 조금만 해부해보면 된다. 독일의 영혼은 무엇보다도 다양하고 여러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형성되었기보다는 짜 맞춰지고 겹쳐놓은 것이다. … 독일인은 엄청나게 많은 종족이 혼합되고 뒤얽힌 민족이다. … 그들은 정의하기 어려우며 이 점만으로 이미 프랑스인들을 절망하게 만든다. 독일인들 사이에서도 ‘무엇이 독일적인 것인가?’라는 물음이 결코 사그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독일인들을 특징짓는다. 243절
… 독일인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생성 중에 있으며 ‘발전하고 있다’. 244절
독일인에 대한 니체의 표현도 비슷하다. 독일은 유럽에서도 아주 늦게 19세기 후반이 되서야 ‘나라’로서의 면모를 갖게 되었다. 이전까지 독일은 ‘무엇이 독일적인 것인가’라고 물을 정도로 나눠져 있었고, 수백개의 작은 공국에 수많은 작은 왕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혼합되고 뒤얽혔기에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탄생할 수 없는 존재, 고귀한 인간이 나올 가능성을 품고 있다.
오늘날 유럽인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것으로 우리는 ‘문명’이나 ‘인간화’ 또는 ‘진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는 그것들을 유럽의 민주주의 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새로운 유럽인이 이렇게 생성되고 있는 과정은 커다란 반동에 의해서 지체될 수 있지만, 아마도 바로 그 때문에 오히려 그 격렬함과 깊이가 증대될 것이다. … 대체로 인간의 평준화와 범용화라는 결과를 낳게 될 그 새로운 조건들은 가장 위험하고 가장 매력적인 성질을 지닌 예외적인 인간을 출현시키는 데 가장 적합한 조건이기도 하다. 242절
민주주의에 대한 니체의 묘사를 보면 ‘고귀한 인간이 어디서 오는지’에 대한 답이 조금 더 확실히 나타난다. 왜냐하면 니체에게 민주주의는 ‘난쟁이’를 생산하는 체제이고, 노예도덕에 물든 평범한 인간들, 범용적인 인간들을 양산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8장에서 니체는 민주주의가 품은 ‘격렬함과 깊이’에 대해서 말한다. 민주주의란 말 그대로 demos-kratia, 즉 ‘민중들의 힘’으로 운영되는 체제이다. 민주주의란 귀족주의, 군주주의처럼 하나의 체제가 아니라 민중들이 원하는 바를 힘으로 하도록 하는 정치체제다. 민주주의에서 각각의 민중들은 각자의 힘을 마음껏 드러내고 표현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조건 속에서 ‘위험하고 매력적인 예외적인 인간’이 출현할 최적의 조건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서로에게 위해와 폭력을 행사하고 착취하는 것을 삼가면서 자신의 의지를 다른 사람의 의지와 동일시하는 것, 그러나 사람들이 이러한 원칙을 폭넓게 받아들여서 사회의 근본원칙으로 만들려고 할 경우에는 그 정체가 즉시 탄로 나게 될 것이다. 즉 그것은 생명을 부정하려는 의지이자 해체와 퇴화의 원칙으로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생명 자체는 본질적으로 자신보다 약한 타자를 자기 것으로 하고 그것에게 위해를 가하고 그것을 억압하는 것이다. 그것은 냉혹하며, 자신의 형식을 타자에게 강제하고 타자를 자신에게 동화시키는 것이고, 가장 부드럽게 말한다고 해도 최소한 착취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도처에서, 심지어는 과학의 가면을 쓰고 ‘착취적인 성격’이 사라지게 될 미래의 사회 상태에 열광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내 귀에는 마치 일체의 유기적 기능이 정지된 하나의 생명을 창조하겠다는 약속과 다름없는 것으로 들린다. 착취란 부패하고 불완전하고 원시적인 사회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유기체의 근본적인 기능으로서 살아 있는 것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의 의지 자체인 본래의 힘에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259절
자, 이제 대답해보자. 고귀한 자는 어디서 오는가? 또한 고귀한 자는 무엇인가? 독일적인 것, 바그너의 음악,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니체의 논의를 보았듯이 고귀한 자는 저기 멀리서,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고귀한 자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 속에 있다. 그것들 속에 있는 모순들을 극복하면서 나타나는 힘에의 의지를 드러내는 자다. 이는 <차라투스트라> 3부에서 중력의 영이 차라투스트라는 시험하는 부분과 흡사하다. 모든 세상의 짐과 고통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짊어지고 가는 것이 기쁨일 수 있겠는냐는 무서운 유혹!
고대 그리스에서 귀족들은 자신들을 ‘우리 진실된 자들’이라고 불렀다. 어디에서든 도덕적인 가치 표시가 먼저 인간에게 붙여지고 나중에 비로소 파생된 방식으로 행위에 붙여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 고귀한 종류의 인간은 자신을 가치를 규정하는 자라고 느끼기 때문에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가치를 창조하는 자다. 그는 자신에게 속하는 것을 존중한다. 그러한 도덕은 자기에 대한 친미다. 충만한 느낌, 넘쳐흐르려고 하는 힘의 느낌, 고도의 긴장에서 오는 행복감, 베풀어주고 싶어하는 풍요로움의 느낌이 그런 도덕의 전경에 드러나 있다. 260절
9장 고귀한 자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자.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고귀한 자는 고귀한 행위를 하는 인간이 아니다. 고귀한 자는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자이다. 여기서 역전이 생긴다. 고귀한 행위가 먼저 있고, 그에 부합하는 고귀한 인간이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고귀한 인간이 먼저 탄생하고 그가 하는 모든 행위들은 ‘고귀한 행위’가 된다. 단순한 역전 같지만 여기서 모든 것이 바뀐다.
좋은 행위, 선한 행위란 무엇인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살펴보았듯, 도덕이란 고정된 어떤 본질, 진리가 아니다. ‘도덕’에도 역사가 있다는 말이고, 도덕학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이전에 선한 행위로 여겨졌던 것이 지금은 악한 행위가 될 수 있다. 도덕이란 그 사회를 이루는 시기에 형성된 강제이고, 오랜 억압으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니체가 말하는 강자, 고귀한 자, 귀족은 그저 힘만 쎈 탄압자들, 건물주, 정치가들인가? 그렇지 않다. 역설적으로 니체가 말하는 강자는 현재의 소수자와 결을 같이 한다. 니체가 말하는 강자의 첫째 조건가 ‘가치를 창조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게 넘쳐흐르는 힘을 찬미하고, 자신의 취향에 어떤 부정도 갖지 않는다. 니체식으로 말하자만 강자는 자신의 행위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타인에 대한 인정과 칭찬은 그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일리아스>에 나오는 귀족들을 살펴보자. 우리는 귀족aristocrat이라는 말에서 어떤 본질적인 행위들을 떠올린다. 약한 자들을 보호하고, 자신의 부를 사회를 위해서 쏟아붙는 사람들! 하지만 <일리아스>에서 aristocratous라는 말은 ‘고귀한 자’들의 행위에 붙는 형용사에 불과했다. 즉 먼저 고귀한 자(전사)들이 있었고, 그들의 행위를 일컬을 때 aristocratous라는 형용사를 사용했다. 그러면서 점차적으로 고귀한 자들은 aristocrat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의식’이 겸손해지는 시기가 다가왔다고 말했다. 즉 지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 무엇인지, 자신의 기준이 무엇인지, 자신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의 이목에만 너무나 치우쳐 있다. 쉽게 말해서 훌륭한 근대인은 주변 사람들의 눈치만을 보는 너무나 왜소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고귀한 행위가 무엇인가 묻기 전에 고귀한 인간이 어디서 오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서슴치 않고 자신의 행위에 찬미를 더할 수 있는 자, 자신과는 다르지만 자신의 가치를 보여주는 다른 강자를 사랑하고, 진정한 적을 존경할 수 있는 자, 그가 바로 고귀한 인간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귀한 인간은 바로 우리 문명 속에, 내 안에 들어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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