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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니체, 계보학, 역사

by 홍차영차 2021. 3. 4.

< 니체,계보학,역사>, 푸코 1971 정리

 

 

 

 

 

푸코를 명명할 수 있는 여러가지 말이 있지만, ‘역사학자’라는 말만큼 그를 잘 설명하는 낱말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역사학은 <니체, 계보학, 역사>라는 논문에서 스스로 말했듯이 전통적인 역사학과 다르다. <광기의 역사>, <감시와 처벌>만 보더라도 그가 추구하는 역사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푸코는 스스로가 ‘진정한 역사학’, ‘쓸모있는 역사학’이라고 부르는 방법론은 니체에게서 배운 듯 하다. 푸코가 니체의 계승자로 여겨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푸코가 니체의 문제의식들과 주제를 이어갔기 때문이라기보다 니체의 방법론, 계보학이라는 방법론을 한층 더 치밀하게 밀고 나갔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기원들origin에 대한 추구”와 대립하는 것이다.

 

연속이 아니라 절단

계보학(genealogy, 족보학, 가계도)이라는 말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지금 나로부터 연결되는 연속성을 파악하려는 시도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계보학은 연속이 아니라 단절을 추구한다. 계보학은 지금 내가 따르고 있는 법, 도덕, 관습들과의 연속점을 파악하기보다는 어떻게 해서 폭력(행위)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법률, 도덕, 관습으로 받아들여졌을까를 질문한다.

파울 레의 <도덕 감정의 기원>(1877)은 분명 이러한 ‘계보학’의 실험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도달한 곳은 계보학의 골짜기가 아니라 역사학의 산봉우리였다. 그는 분명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던 ‘도덕’의 기원에 대해 의심을 품었고, 지금과 달랐던 모습의 도덕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는 현재 ‘도덕’을 지키는 이유(이익/유익함)를 가지고 추적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도덕의 기원에 관한 내 가설을 일부 발표할 동기를 나에게 최초로 준 것은 한 권의 명료하고 깨끗하고 사려 깊으며 또한 조숙한 작은 책이었다. 나는 이 책에서 반대로 뒤집히고 전도된 방식의 계보학적 가설들을 ……. 그 책의 제목은 <도덕 감정의 기원>이었다. 책의 저자는 파울 레 박사였으며, 출판된 해는 1877년이었다. 내가 이 책만큼 문장 하나하나, 결론 하나하나를 마음속으로 부정할 정도로 그렇게 읽은 책은 아마 없을 것이다. (<도덕의 계보>, 341쪽)

 

‘진정한’ 역사학은 지금으로부터 이어진 연속선을 긋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다만 ‘우연이라는 주사위통을 흔드는 필연이라는 저 철로 된 손’만이 존재하는 상황 속에서 그 사건, 법칙, 도덕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 이어졌던 사건들을 단절시키고, 이러한 단절되고 고립되었던 사건들을 이어붙인 거칠고 잔인한 폭력과 힘들의 충돌을 드러내는 것이다.

 

역사학이 좋아하는 가면들

고상한 기원이란 현재를 감추고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형이상학적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진리란 사물들이 가지고 있는 본질이 아니라 하나의 형상을 구성하기 들어간 잡동사니, 오류임이 분명하다. 다만 진리는 역사라는 빵을 굽는 과정에서 너무 오랫동안 구워져 변경불가능하게 굳어져버렸기에, 불변하는, 한 번도 바뀐 적 없어 보일 뿐이다.

가장 매혹적이면서도 위험한 가면은 바로 우리의 욕망이다. 역사학자들은 우리의 욕구를 기원에 위치시킴으로써 우리를 설득시키려고 한다. “위험한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는 서로 계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 비이기적인 행위란, 그 행위로 인해 이익을 얻는 사람의 입장에서 칭송되고 좋다고 불렸다.”

역사가의 역사학은 시간의 외부에서 그것의 지주를 발견한다.

육체는 사건들의 각인된 표면이며, 분열된 자아의 저장고이고, 끊임없이 풍화되고 있는 한 권의 책이다.

 

 

 

 

1

계보학은 모든 단선적인 목적성의 외부에서 사건들의 고유성을 기록해야만 하며, 계보학은 가장 가망없는 장소에서, 우리가 느끼기에 역사가 없는 곳에서 - 즉, 정서, 사랑, 양심, 본능과 같은 것에서 - 사건들을 찾아야 한다. 계보학은 사건들의 반복에 대해 민감해야 하는데, 이는 사건들의 점진적인 진보곡선을 추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각 사건이 상이한 역할들을 수행했던 다양한 장면들을 서로 고립시키기 위한 것이다. (<니체, 계보학, 역사>, 1절)

 

2

그 고상한 기원은 ‘형이상학적 연장’에 지나지 않으며, 이러한 연장은 ‘사물들이란 탄생의 순간에 가장 진귀하고 본질적이라는 믿음으로부터 발생한다’. …… 기원은 항상 ‘몰락’에 선행한다. 기원은 육체 이전에, 세상과 시간 이전에 출현한다. 기원은 반신들과 연결되며, 기원 이야기는 항상 하나의 찬송가로 노래된다.

진리는 결코 반박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오류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진리는 역사라는 빵 굽는 과정에서 너무 오랫동안 구워져 변경 불가능한 형식으로 굳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 가치, 도덕성, 금욕주의, 지식 등에 대한 계보학은 이것들의 ‘기원’에 대한 탐구와 혼동되면 안 된다. 혹은 접근 불가능한 역사의 영고성쇠로서 무시되어서도 안된다. 그 반대로 계보학은 모든 시초를 포함하여 우연들과 세부사항들을 파헤칠 것이다. …… 계보학은 자기가 어디로 가게 되든지 결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 계보학자는 역사에게 기원이라는 망령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역사란 마치 신체처럼 그것의 강한 순간과, 그것의 쇠퇴와 그것의 뒤끓는 흥분과 졸도 같은 순간들로 점철된다. 오직 형이상학자만이 기원이라는 머나먼 이상향에서 그것의  영혼을 찾아 헤메곤 하는 것이다. (2절)

 

3

그렇게 하는 것은 진리 혹은 존재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뿌리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우연들이라는 외재성에 놓여 있음을 발견하는 일이다. 이는 의심할 바 없이, 왜 모든 도덕성의 기원이란 그것이 경건하기를 멈춘 순간부터 하나의 비판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가 하는 이유이다. (사실 그 내력Herkunft(유래, 가계)은 한 번도 경건할 수 없다.) …… 계보를 탐구하는 일은 기초를 다지는 일이 아니다. 그 반대로 계보학은 이전에는 부동이라고 고려되었던 바를 혼동시키며, 동질적이라고 상상되었던 것의 이질성을 보여주며, 통일된 사고였던 것을 조각낸다.

… 육체는 과거 체험의 낙인을 유지하며, 갈망들과 실패들과 오류들을 낳기도 한다. …… 육체는 사건들의 각인된 표면(언어에 의해 추적되며 관념에 의해 용해되어 버리는)이며, 분열된 자아(실질적 통합의 환상을 채택하는)의 저장고이고, 끊임없이 풍화되고 있는 한 권의 책이다. 따라서 가계의 분석인 계보학은 육체와 역사의 분절점 내에 위치한다. 계보학의 임무는 전적으로 역사에 의해 자취가 보존된 하나의 육체를 드러내는 일이며, 육체에 대한 역사의 파괴 과정을 폭로하는 일이다. (3절)

 

4

형이상학자들은 현재의 욕구들을 기원에 위치시킴으로써, 애매모호한 목적을 우리에게 납득시키려 한다. 그 목적의 완전한 실현을 그것이 발생한 순간에서 찾으려고 말이다. 그렇지만 계보학은 … 의미의 선행적인 권위가 아니라 지배력들의 모험적인 유희를 다시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규칙들의 세계는 결코 폭력을 순화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 아니라 폭력을 충족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다. 전통적인 믿음에 따라 다음과 같은 생각하는 것은 오류에 불과하다. … 그 반대로 법률은 계산된 냉혹한 쾌락이며 장래의 유혈에 대한 환희이다. 즉 그것은 새로운 지배력들의 끊임없는 선동을 허용하며, 폭력 장면들의 끊임없는 상연을 허용한다. … 인간성이란 그것이 보편적 호혜성에 도달하여 결국 법률의 지배가 전쟁을 대신하게 될 때까지 전쟁과 전쟁을 거듭하면서 점진적으로 진보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성은 자기의 폭력 수단들 각각을 규칙들의 체계로 승격시키며 따라서 지배로부터 지배에로 진행한다. …… 규칙들은 비인격적인 것으로서 어떠한 목적에로도 편향될 수 있다. 역사상 온갖 성공들은, 이들 규칙들을 장악할 수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만일 해석이 어떤 기원에 숨어 있는 의미에 대한 점진적인 폭로과정이라면, 형이상학만이 인간성의 발전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해석이 규칙들의 한 체계 - 아무런 본질적인 의미도 갖지 않는 - 를 하나의 방향을 부과하기 위해, 그것을 새로운 의지에로 편향시키기 위해, …… 폭력적으로 전유하는 것이라면, 이 경우 인간성의 발전은 일련의 해석들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해석이 규칙들의 한 체계(아무런 본질적인 의미도 갖지 않는)를 하나의 방향을 부과하기 위해, 그것을 새로운 의지에로 편향시키기 위해, 전혀 다른 게임에 그것을 참여케 하기 위해, 그것을 부차적인 규칙들로 만들기 위해… 폭력적으로 전유하는 것이라면, 이 경우 인간성의 발전은 일련의 해석들일 것이다. (4절)

 

5

역사가의 역사학은 시간의 외부에서 그것의 지주를 발견하며 그 역사학의 판단이 하나의 계시적 객관성에 근거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진리라든가 영혼불멸이라든가 언제나 자신과 동일한 의식의 본성에 대한 믿음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육체가 생리학의 배타적 법칙들에 복종하며 역사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 역시 잘못이다. 육체는 매우 많은 서로 다른 체제들에 의해 형성된다. 말하자면 그것은 노동과 휴식과 휴일의 리듬에 의해 파괴되기도 하며, 식사습관이나 도덕 규범을 통해 음식이나 가치의 포로가 되기도 하며 저항력을 기르기도 한다. … 인간에게 자기 이해라든가 타인의 이해를 위해 토대 역할을 할 만큼 충분히 안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역사학은 우리의 존재에 불연속성을 도입하는 한에 있어서만 쓸모있게 된다. 쓸모있는 역사학은 자아로부터 생명과 자연의 확실한 안정성을 제거한다. … 이것은 지식이 이해를 위해서가 아니라 절단을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 쓸모있는 역사학은 하나의 세력관계의 역전이요, 권력의 찬탈이요, 이미 사용했던 사람들에 대항하여 하나의 어휘, 즉 점차 느슨해져서 스스로에게 해가 되는 하나의 나약한 지배력에 대한 전유요 가면을 쓴 ‘타자’에로의 진입이다. … 쓸모있는 역사학의 세계에서는 섭리라든가 궁극적인 원인이란 없으며, 오직 하나의 왕국, 즉 ‘우연이라는 주사위통을 흔드는 필연이라는 저 철로 된 손’(<아침놀> 130)만이 존재한다. …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는 결코 사건들이 그것들의 본질적인 특징이라든가 궁극적인 의미라든가 최초와 최후의 가치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위축되어 버리는 그러한 단순한 세계가 아니다.

전통적인 역사학은 먼 것들과 높은 것들, 이를테면 가장 숭고한 시기들이라든가 최고의 형식이라든가 가장 추상적인 관념들이라든가 가장 순수한 객체들에 대한 사고에 깊이 빠져든다. 즉, 전통적 역사학은 유명한 우물 안 개구리 식의 퍼스텍티브를 적용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 자기 자신을 산등성이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쓸모 있는 역사학은 자신의 시야를 자신에게 가장 접근한 것들 - 육체, 신경조직, 영양섭취, 소와, 에너지 -로 축소시킨다. 

역사학은 철학의 시녀가 되어 진리와 가치의 필연적 발생을 재검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과제를 안고 있다. 즉 역사학은 활력과 쇠퇴, 고양과 타락, 독약과 해독제를 구별해주는 지식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역사학의 의무는 치료과학이 되는 것이다. (5절)

 

6

역사가의 혈통Herkunft은 애매모호하지 않다. 즉 그는 비천한 태생이다. 역사학의 한 가지 특징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어떠한 것도 역사에서 벗어나서는 안되며,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떠한 것도 역사로부터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총체적 지식에 대한 역사가의갈망의 근저에는 모든 것을 축소시키는 비밀에 대한 욕구, 즉 천박한 호기심이 자리잡고 있다. 역사학의 전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서민들로부터 온다. 그것은 누구 앞으로 보내진 것인가? 서민들에게 보내진 것이다. 역사가는 선동가의 분신으로서 기능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 “여러분의 현재보다 위대한 과거란 결코 없다. 그리고 나의 해박한 박식함을 통해 나는 여러분으로부터 여러분의 분별력 상실을 제거할 것이며 역사의 위대함을 사소하고 악하며 불행한 것으로 변형시킬 것이다.” 

역사학의 출처는 뒤범벅과 잡종의 땅이며, 잡종인가의 시대인 19세기 유럽이다. 위대한 시기들에는 (과거에 대한) 이러한 호기심이 없었으며, 과도한 존경도 없었다. 이 시기들은 자신의 선조들을 무시했다. … 즉 모든 개체적 특징들을 소멸시켜 버린 19세기의 여러가지 힘들과 그 혼잡한 것들에 대한 현기증은 금욕주의적 고행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낳았다. 또한 창조 불능, 예술활동의 부재, 과거의 업적에 대한 의존 요구는 역사로 하여금 서민의 천박한 호기심을 채택하도록 강요하였다. (6절)

 

7

역사적 감각은 역사에 대한 플라톤의 세 가지 양식에 대립되거나 상응하는 세 가지 용도를 만들어 낸다. 1) 풍자적이고 실재와 대립되며, 회상이나 재인식을 주제로 삼는 역사에 반대한다. 2) 고립적이고 동일성에 대립되며, 한 전통의 연속이나 대변자로서 주어지는 역사에 반대한다. 3) 희생적이고 진리에 대립되며, 지식으로서의 역사에 반대한다. 

계보학의 지도를 받은 역사학의 목적은 우리의 주체성의 뿌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을 가능한 한 소비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출현한 특유의 문지방, 즉 형이상학자들이 회귀를 약속한 고향을 규정하려 하지 않는다. (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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