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니체

사유의 고속도로

by 홍차영차 2020. 9. 1.

사유의 고속도로에서 벗어나기

: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3,4장







반대로 작동하는 자전거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는 데 8개월이나 걸렸다?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물론 처음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울 때 긴장도 되고, 죽을 것만 같은 위험 혹은 스릴을 느끼긴 했다. 하지만 1~2주 정도 연습하다보면, 이미 자전거를 능숙하게 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자전거 타는데 8개월이나 걸린 사람은 운동신경이 매우 떨어지는 사람이었을까? 


이 친구가 타려고 한 자전거는 ‘반대로 움직이는 자전거(The Backwards Brain Bycle)’였다. 원리는 간단하다.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바뀌는 반대편 왼쪽으로 돌아간다. 원리를 알았으니 쉽게 탈 수 있지 않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미 다른 방식의 자전거 타는 법을 알고 있던 이 친구는 새로운 방식의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는데 8개월의 시간이 필요했다.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참고로, 7~8살쯤 되어 보이는 그의 아들은 이 새로운 방식의 자전거를 타는데 겨우 2주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떤 원리를 알았다고 해서 그대로 행해지지 않는다. 다른 방식의 자전거를 타려면 다른 방식의 신체 작동이 가능해야 한다. 신체적으로 원리를 익히는 것은 좀 더 가시적이고 도달 가능해보인다. 오래 걸리긴 해도 그런 방식으로 오랫동안 연습하면, 그 원리가 신체에 새겨지기 때문이다. ‘자전거가 오른쪽으로 쓰러질 것 같으면 핸들을 왼쪽으로 돌리고, 왼쪽으로 쓰러질 것 같으면 오른쪽으로 돌린다’를 머리로 생각해서 움직이려고 하면, 자전거는 이미 넘어졌다.

여기서부터는 어느 정도 상상이 간다. 자전거 타는 법을 이미 배운 우리는 뉴런neuron의 신호전달이 자동화되어졌다. 그리고 거의 비슷한 작동 메커니즘에서 단 하나, 핸들 사용법만 다른 자전거를 탈 때 신체와 뉴런의 신호전달은 자꾸 이전에 익숙했던 진로를 가려고 한다. 이미 고정된 길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아마도 자전거를 탄 지 얼마 되지 않은 8살짜리 아이는, 정상 자전거를 타는 시냅스 회로가 여전히 유연한 상태였고, 반대로 움직이는 새로운 방식이 하나 더 들어오더라도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기

자전거와 신체는 눈에 보인다. 기존의 원리로 자전거를 타려고 하면, ‘그’ 자전거를 탈 수 없다. 시간이 필요하고, 지속적인 실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유 방식에서는 그게 그리 쉽지 않다.

내가 어떤 사건, 사람, 사물을 이해했다는 것은 그 어떤 것이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는 사유 방식에 맞게 작동할 때이다. A-B-C라는 논리로 조직된 자신의 사유 방식에 맞지 않는 것들은 낯설게 느껴지고, 불편하며,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하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존의 방식으로 자전거를 타려는 시도와 비슷하다. 사유 방식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전에 생각했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내려면 기존의 자전거 타는 법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새롭게 관념의 길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미 고속도로로 뚫려서 시원하게 내달릴 수 있는 기존의 사유 방식에서 벗어나 국도 혹은 아주 작은 1차선 도로를 달리려면 답답할 수밖에 없다. 속도는 조금 느릴지 모르지만, 그렇게 할 때 기존의 고속도로 사유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사실 이런 풍경을 맛볼 수 있는 것은 느린 속도와 장애물처럼 느껴졌던 둔턱들 때문이다.

사실 신체로 부딪히는 자전거 타기와 달리, 새로운 사유 방식에 적응하거나 새로운 사유 방식으로 사유하는 것은 더 어렵게 느껴진다. 거의 비슷한 외형을 가진 자전거이지만 원리가 조금 달라졌을 때 더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의 사유 방식은 언어라는 외형상 동일한 도구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물 그 자체에서 오직 단어만으로

처음에 우리는 사물 자체를 가지고 소통했다. 나무의 결, 장미의 향, 씀바귀의 맛, 거칠고 부드러운 소리를 가지고 직접적으로 풍성하게 느끼면서 소통했다. 여기에 언어가 도입되면서 사유의 광대한 영역이 펼쳐진다. 이제 소나무와 도끼를 말하기 위해서, 실물 소나무의 향과와 도끼의 날카로움은 필요 없다. ‘소나무’, ‘도끼’라는 단어만으로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작은 동네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여기에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고 다양해질수록 언어는 점점 더 일반화될 수밖에 없다. 용인 수지구에서 말하는 집 안에서 자라는 소나무와 강원도 대관령의 숲에 있는 소나무는 같은 단어로 불리지만 전혀 다른 특성을 갖는다.

언어 사용이 점점 더 일반화되면서, 사람들은 이제 언어만으로 소통하고, 단어에서 사물 그 자체가 갖고 있는 구체적인 특성들을 모두 제거한다. “인간은 언어로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고 믿었다.”(31쪽) 분명 말하기가 더 쉬워졌고, 사유 속에서 개념만으로 소통하기가 편해졌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언어는 그 출생부터 모순을 달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소나무’라는 단어는 소나무를 말하지만 결코 소나무를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근대인들 모두는 정신병을 갖고 산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수많은 언어로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도대체 모르고 말할 때가 많다. 다양한 단어로 말하고, 소통하지만 이 단어들 사이에는 살아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초기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 이후에 니체의 고민은 여기 놓여 있는 것 같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말하는 사유 방식으로는 도무지 소통할 수 없다고. 이전 사유와 다른 방식의 사유 방식이 필요하다고. 관념이 항상 가던 길로만 다니지 않고, 전혀 다른 길을 다니게 하고, 때로는 부딪히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서는 한 동안 서 있을 필요가 있다.

가까운 미래에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라는 단어는 어떤 특별(하게 악)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2020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특징짓는 말로 사용될지도 모른다. 태어나면서부터 합리적, 논리적, 언어적 소통에 익숙해져 버려서 그 이외의 사유를 이해 할 수 없었던 사람들! 일단 자전거 타는 법 잊어버리기부터 시작해보자.



'니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적극적인 힘들과 반응적인 힘들  (0) 2020.12.02
니체와 비극  (0) 2020.11.18
현실을 있는 그대로 생각한다  (2) 2020.08.19
니체 읽기, 답이 아니라 문제  (0) 2020.08.12
의식(을 가진 인간)의 딜레마  (0) 2020.06.04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