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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스피노자 개념 확대경 1) 자유 의지 혹은 필연성

by 홍차영차 2020. 5. 3.

스피노자주의자들의 책들을 읽을 때마다 그들의 통찰에 놀라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의 통찰에 매혹되어 직접 스피노자를 읽고 싶은 열망에 <에티카>를 펼치는 순간 곧바로 책장을 덮게 됩니다. 왜? 너무 딱딱하고 건조해서 여기에서 아무것도 건져낼 수 없을 것 같으니까.  해석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인간, 감정, 공동체, 행복에 대한 통찰이 <에티카>의 어떤 부분과 연결되는지만 알 수 있다면, 직접 <에티카>를 읽는 것이 조금은 더 쉬워지지 않을까? 뭐, 이런 생각으로 뭔가를 적어보려고 합니다.  


스피노자 개념 확대경

: 1) 자유 의지 혹은 필연성에 관하여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내 맘대로 살고 싶다 = 자유로운 삶’이라고 상상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점점 더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자유롭게 사는 것’인지 헷갈린다. 대학 1학년 물리학 시험 시간에 ‘자유롭게’ 백지 답안지를 냈다고, 21살에는 ‘내 마음대로’ 휴학을 선택하고 배낭여행을 떠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이러한 결정은 나의 자유의지이고, 내 마음대로 선택한 것이었을까? ‘내 마음대로’ 산다고 했을 때 그 ‘마음’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도 궁금해진다. 어떤 것도 백지로부터 생성되는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스피노자 철학을 개념의 발명이라고 정의한다면, <에티카>에 나타난 자유는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자유와는 전혀 다르다. 다르다는 것을 넘어서서 스피노자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자유의 정반대 편에 서서 자유를 정의한다.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실존하고 자신에 의해서만 행위하도록 규정되는 실재는 자유롭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실재에 의해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되는 실재는 필연적이라고 또는 오히려 제약되어 있다고 한다. (<에티카> 1부 정의 7)



자유의지는 없다 오로지 원인에 대한 무지만이 있을 뿐

스피노자에게 자유란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행하고 사고하는 것이다. 먼저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이란 말부터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 말에서 제약과 예속을 떠올린다.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을 깨는 것을 자유라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규정되어 움직인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의 세상의 모든 것들은 상호 원인과 결과의 연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바라보는 세상에는 단 하나의 실체만이 있고, 그 실체는 신, 즉 자연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우리가 (사물과 개체 모두를 포함하는) 개체로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이러한 실체들의 변용일 뿐이다.


실체의 본성에는 실존함이 속한다. (1부 정리 7)

신에 의해 생산된 것들의 본질은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 (1부 정리 24)


하나의 사물(혹은 개체)이 그 본질에서 실존을 갖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존재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의 모든 개체는 항상 다른 개체들, 즉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모든 실재들’에 의존하여 실존한다. 개체는 실존하지만 항상 조건부 실존일 뿐이다. 그런데 다른 개체와 환경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규정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어떻게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 존재하는 자유가 될 수 있을까? 스피노자에게 자유란 곧 인과적 필연성의 인식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그 인과적 필연성을 인식하고 있다면 어떤 것도 자유로운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거꾸로 말해서 우리가 ‘자유의지’라고 말하는 대부분의 생각과 선택은 실상 자신의 행동에 대한 원인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독특한 실재, 곧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모든 실재는 역시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다른 원인에 의해 의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되지 않는 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될 수 없으며 이 후자의 원인 역시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다른 원인에 의해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되지 않는 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될 수 없으며, 이처럼 무한하게 나아간다. (1부 정리 28)

자연 안에는 우연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1부 정리 29)

의지는 자유 원인이라 불릴 수 없으며, 단지 필연적 원인이라 불릴 수 있다. (1부 정리 32)



변하지 않는 구조가 아니라 본성의 필연성

자유는 원인에 대한 인식, 즉 인과적 필연성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유에 대한 인식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답답하게 느껴진다. 스피노자의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숙명이고, 짜여진 구조를 파악하고 거기서 적응하라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여전히 ‘규정된 방식’이라는 말 자체가 주는 갑갑함이 풀리지 않는다.

분명 스피노자는 <에티카> 1부에서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실존하고 행위하는 것을 자유라고 정의했다. 인과적 필연성, 즉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고정된 구조 속에 갇히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 새로 나온 스마트폰이 있다. 난생 처음 이 사물을 본 사람이라면 스마트폰의 화면을 이용하여 거울 정도로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스마트폰과 친숙해지고 이것의 본성을 더 잘 알게되면서 그는 스마트폰을 자유롭게 사용하게 된다. 전화도 걸고, 인터넷도 하고, 동영상도 보며 사진도 찍게 된다.

인간 개체 역시 마찬가지다. 각자의 개체가 갖게 되는 본성의 필연성을 인식할수록 우리는 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한 번도 뛰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마라톤을 하겠다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본성의 필연성’에 대한 무지일 뿐이다. 자신의 신체와 사유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지 ‘본성의 필연성’을 잘 알게 될 수록 우리는 더 자유로워진다. 스피노자식으로 말하자면 더 큰 역량을 갖게 되고, 더 높은 완전성으로 더 자유로워진다.



+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역량은 반비례일까

‘자기 마음대로, 감정 가는대로 움직이는’ 자유로운 사람을 떠올릴 때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공동체의 안정성이다.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불)안정성! 자유에 대한 통념은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개인과 공동체는 일종의 긴장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떠올리는 공동체란 개체적인 독특성을 무시하는 법률과 그에 대한 처벌(공포와 희망)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개인의 자유도와 공동체의 역량은 반비례 관계일 수밖에 없다. 자유로운 사람들로 이루어진 역량높은 공동체는 불가능할까?

스피노자는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이러한 고정관념을 다시 한 번 전복시킨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에게 자유로운 인간이란 인과적 연쇄에 무지한 사람이 아니라 ‘본성의 필연성’으로 원인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사고하며 행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주어진 그 본성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따라 나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실존하지 않는다. (1부 정리 36)

이성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는 한에서만 사람들은 항상 필연적으로 본성상 합치한다. (4부 정리 35)

이성에 인도되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복종하는 고립 상태보다는 공동의 법령에 따라 살아가는 국가 안에서 더 자유롭다. (4부 정리 73)


스피노자에게 자유로운 인간이란 주어진 상황에 정념적(passive, 수동적)으로 움직이기보다는 전후 상황의 맥락을 살펴보는 사람이고, 독단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주변의 환경, 사물, 인간들과 함께 생각하는, ‘점점 덜 혼자서 사고하는’ 개체이다. 또한 이성적인 사람들은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 역시 이성적이기를 원하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역량은 모두 자연적 질서, 우주의 인드라망의 인과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인과 공동체의 관점에서 인과적 필연성에 대한 인식은, 흔히 말하는, 전체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나 전체를 위한 부품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자유로운 인간은 본성의 필연성을 파악하고 그 본성대로 행위하는 인간이다. 그렇다면 그런 인간들로 구성된 공동체란, 각각의 독특성을 무시하고 부분들을 일률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반대로 각각의 개체들이 갖고 있는 특이성을 인식하고 그 특이성이 잘 표현될 수 있도록 하면서 공동체를 구성한다. 이렇게 한 공동체에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자유인이 점점 더 많아진다면 그 공동체의 역량이 ‘역대급’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인간 신체가 여러가지 방식으로 변용될 수 있도록 배치하거나 인간 신체가 여러가지 방식으로 외부 물체를 변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인간에게 유용하다. 그리고 그것이 신체로 하여금 더 많은 방식으로 외부 물체들에 의해 변용될 수 있고 또 그것들을 변용할 수 있게 만들수록 그것은 더욱 더 유용하다. 반대로 신체가 이 일을 덜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해롭다. (4부 정리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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