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기관 없는 신체
: <천의 고원>은 장자 철학의 한 줄 주석에 불과하다
: <장자> 잡편 - 경상초, 사무귀, 즉양
거대한 성벽이 눈 앞에 있다.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지금 이곳이 너무나 가혹하기에 성벽을 건너는 상상을 금할 수 없다. 가장 약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두드리면 성벽은 도리어 더욱 단단해지고, 부수지 않고 뛰어넘는 것을 시도해보지만 그곳에는 보이지 않는 유리벽이 있다. 아! -.-; 이 난공불락의 성벽을 어떻게 넘을 수 있을까? 불굴의 의지로 성벽을 이루는 성분을 분석하고, 성벽의 구조를 세밀하게 분석한다. 주변의 환경과 지나온 경험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무기/기술 개발에 들어간다. 이제 성벽의 구조와 성분은 파악되었고, 정확한 수치가 계산되었다. 100% 확실성을 가지고 ‘우리 자신까지도 파괴할 정도의 가공할 무기’를 장착하고 성벽 무너뜨리기를 시도해본다. “아, 저기 난생 처음보는 성벽의 균열이 보인다. 조금만 더 하면 성벽을 부셔버릴 수 있을 것 같다. 혹여 실패하더라도 조그맣게 뚫린 구멍으로 시원한 공기와 싱싱한 과일은 공급받을 수 있겠다.”
한 편에서 이처럼 철저한 처절한 계산과 분석을 통해서 거대한 성벽을 넘어서려고 시도하고 있는데, 저기 멀리 성벽 문 앞으로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고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는 사람이 걸어간다. “설마 저 ‘문’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놀랍게도 성벽의 문은 걸어오는 ‘그’ 사람에 딱 맞춰 열리고 닫힌다. 평생 성벽을 두드리며 목숨을 걸어온 사람들이 털썩 주저 앉는다. 환영인가, 바람인가, 물인가.
분석과 계산으로 자본주의를 넘어가보려는 시도 속에서 ‘자본주의와 분열증’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천의 고원>이 도달한 것이 바로 이 지점인 것 같다. 철저한 계산과 분석이 아닌 기관없는신체, 고른판, 추상기계, 리좀과 같은 요상하고 말도 되지 않는 것 같은 개념들을 가지고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시도. 신기하게도 <장자> 잡편을 읽으면서 들뢰즈/가타리의 기관없는 신체가 떠올랐다. 장자는 처음부터 성벽을 부수어야 한다는 우리의 생각 자체에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요와 순을 어찌 칭찬할 만하다고 하겠는가!
잡편 ‘경상초’에서 경상자는 자신이 사는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고장의 주인’으로 받들려는 모습에 언짢아 한다. 자신이 잘 ‘숨어’ 죽은 듯이 지내지 못했기에,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차렸다’는 것이다.(563) “하루 이틀로 보아서는 별로 큰 일을 한 것 같지 않은데 한 해의 일로 보니 놀라운 성과를 올리고 있소.”(564)라는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코 경상자가 자신의 주체성을 드러내면서 일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하루 하루의 일상을 잘 꾸리며 살아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상자는 자신이 완전한 ‘기관 없는 신체’가 되지 못했기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기관 없는 신체란 무엇인가? 살아 있지마나 자연의 도와 함께 자연 속에 놓여 있기에 아무도 그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상태가 아닌가. 어느 순간 기관 없는 신체는 맞이하는 자연의 질서 속에서 자신의 형태를 구성하고, 아무도 특별하다고 인식하지 못하는 자신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고는 또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기관 없는 신체가 된다.
언제나 태평성대 그것도 ‘이상적 모델’로 주어지는 요순이 어떻게 “대란(大亂)의 근본”(567)으로 여겨질 수 있는지도 이해가 된다. 아무리 완벽한 인의(仁義)라 할지라도 그것은 매끄러운 공간에 홈을 파는 행위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좋은 원리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의 형태를 갖게 되면, 사람들은 서로 다투게 된다. 기준을 설정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한 순간 하나의 형태로 인의를 구체화할 수 있지만 그것이 영원무궁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연은 의도하지 않으면서 항상 고른판으로 존재할 뿐이다. 자연은 항상 변하지만 자연 안에는 변하지 않는 도가 있다. 변하는 것만을 쫓는 것도 아니고, 변하지 않는 것만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자연의 도가 지나가는 곳에는 항시 생명의 충만함이 있다. “양생의 도란 자연의 대도(大道)와 하나가 되고 성정(性情)을 잃지 않으며…… 모든 일을 자연에 맡기는 것이다.”(572) 어렵지도 않고 헷갈릴 일도 없다. 자연의 도에 ‘사람을 잡아먹는 일’따위는 없다.
이름도 없고, 좋아하는 것도 없고, 잘 하는 것도 없고, …… 없고, …… 아무것도 없다
경산초, 서무귀, 즉양 여기저기에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노자의 사상인지 장자의 사상인지를 나중에 따져보자.) 그리고 잘 들어보면 여기에는 별 다른 그 무엇도 없다. 잘 하는 것도 없고, 이름도 없고,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없어야 한다. 딱 잘라 말하면 ‘나’를 ‘나’라고 부를 터럭만큼의 그 무엇도 없어야 한다. (들뢰즈/가타리의 ‘이것임’과 비슷한 것 같기도.)
장자의 이야기가 결코 낯설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지략(智略)을 일삼는 자는 지략을 쓸 일이 없으면 즐겁지 않고, 변설(辯舌)에 능한 자는 제 의견을 말할 기회가 없으면 즐겁지” 않다.(598) 내가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주제, 내가 잘 아는 요리, 내가 봤던 드라마가 나오면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뭔가 하지 않는 것이 쉽지 않다. 사람들은 자신의 재능(좋아하는 것)을 좀 더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만들려고 알게 모르게 노력(conatus)하고 있다. 이게 사람의 본성이다. 우리는 재주 많은 원숭이가 어떻게 죽는지, 관중이 왜 자신의 후계자로 포숙아를 추천하지 않는지를 즉각적으로 안다.(605) 우리는 자로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고 있고, 왜 공자가 자공에게 말을 조심하라고 말했는지를 추측해볼 수 있다.
하나뿐인 삶을 살아가면서 ‘자기’를 드러내는 그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는 장자의 이야기가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더욱이 이런 삶이 현실에서 가능한 것인지, 그냥 ‘이상적 모델’ -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목표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런데, 나에게 장자의 ‘아무것도 아닌(없는)’ 삶이 그리 낯설지 않다. 들뢰즈/가타리가 언급하는 우글거리는 자아, 기관 없는 신체, 리좀적 삶은 바로 무위자연적 삶을 좀 더 구체적으로, 현대적으로 각색해놓은 것 같다.
철학적 개념으로뿐만 아니라 실제의 삶에서도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다. (놀랍게도 이런 비슷한 존재들이 문탁네트워크에는 꽤 보인다.) 장자 강의도 하고 인류학 강의도 하며, 공상파티에서는 빨간 가발을 쓰고 나오기도 하고, 길드다라는 정체모를 조직을 만들어 20대와 호흡하기도 하는 존재. 주방에 있으면 항상 거기 있었던 것 같고, 비누를 만들고 있으면 원래 자누리 일꾼인가 여겨지며, 하루 종일 가죽을 만지작 거리는 모습에서는 원래부터 손작업을 했던 사람으로 여겨지는 존재.
성벽 너머로 간다는 문제에 다가가는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콜롬버스의 달걀’처럼 처음 그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해결한 방식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또한 다음에는 그 방법이 틀릴 수도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성벽 너머로 가는 길에는 무수히 많은 길이 존재한다는 것, 그 길은 이전부터 계속해서 있었다는 것이다. 바람이 되어 틈 사이로 갈 수도, 거대한 물결의 부분이 되어 넘어갈 수도 있고, ‘똑똑’ 노크를 하고 건너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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