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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예술

소나타 형식과 예술의 정치

by 홍차영차 2017. 4. 17.

소나타 형식과 예술의 정치

- 견고한 세계에서 액체 근대로 -

 

키워드 : 1700년-1800년-1900년, 근대, 액체근대, 조성음악과 불협화음, 소나타 형식, 군주정, 민주정

 

 

오늘 <작은 콘서트>는 ‘소나타 형식’에 대한 간단한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소나타 형식은 언제부터 있었나? 소나타 형식이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베토벤에 와서야 그 형식을 완전히 갖추었고,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 조차도 서로 다른 형식을 보여준다는 대답. 어? 음악적 형식과 현실 정치가 상당히 연결되어 있구나!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음악은 음악만 보고, 인문학은 인문학만 바라보다보니 이런 점에 주목하기가 쉽지 않았다. 소나타 형식을 하나의 삶의 형태라고 생각하고, 이를 시대와 연결해본다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작은 콘서트>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콩브레마을’의 실험에 뭔가 길을 열어주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스카를라티

 

프쉬케psyche와 정치

오늘 듣고 있는 피아노 곡들은 서로 100년간의 차이를 두고 작곡되었다. 베토벤 소나타 18번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근대국가 형성기에 만들어졌고, 스크리아빈 소나타 2번은 함께 공부했던 ‘세기말 빈’ 시기인 1900년 즈음에 작곡되었다. 그리고 스카를라티의 피아노 곡들은 아직 중세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계몽과 과학의 여명기인 1700년대에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런 시대적 차이는 어떻게 음악적 형식과 연결되어 있을까. 특히나 예술에서도 현실 정치와 가장 연관이 없어 보이는 순순한 클래식 음악에서.

음악과 정치와의 상호관계성은 기원전 2400년 전의 플라톤 <국가>로부터 짧게는 100년 전 사회학의 아버지인 막스 베버의 <음악 사회학>에 이미 언급되었다. 하지만 미술작품과 달리 현대의 음악형식과 작품은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주의 깊게 듣는다 할지라도 도무지 그 구조를 파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거의 비명소리에 가까운 현대 음악을 어떻게 정치와 연결시킬 수 있을까. 아마도 자신이 듣고 있는 장소가 ‘예술의 전당’이 아니라면 음악이라고 여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의 비조성적이고 아무런 형식도 갖지 않는 음악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르네상스 이후 서구 음악은 위계적인 조성음악으로 구성되었다. 조성이 위계적으로 구성되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앞서 말한대로 음악 역시 사회 속에서 생성되고, 사회의 영향을 받으며, 사회에 기능을 발휘하는 예술이라는 말이다. “짐이 곧 국가이다!”라는 말을 남겼던 절대군주 루이 14세의 궁정악장 라모가 화성 법칙의 가장 명료하고 비타협적인 이론가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사람들은 음악을 정치와 무관한 순수예술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조성음악의 핵심용어였던 tonic(으뜸음)은 ‘군주’, dominant(딸림음)는 ‘왕국’이라는 뜻이다.^^; 아름답게만 들리는 조성 음악은 오로지 조성을 깨지 않는 상태에서만 불협화음을 허용했고, 소나타 형식은 그 구조(A-B-A’)를 무너뜨리지 않는 한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 이는 마치 입헌제도의 정치 지도자가 주류 권력층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사회 정책과 구조를 조정하는 것과도 같다. 다양한 정책들이 민중을 위한 조치로 보이지만 실상 정치적 구조를 깨지 않는 한에서 용인될 뿐이다. 사실 음악에서의 조성이란 하나의 초점으로 집중된다는 점에서 미술의 원근법 이론과 동일한 사회문화적 체계에 속한다.

 

베토벤

 

근대 국가의 형성과 소나타 형식 - 견고한 질서

베토벤 피아노 소타나 18번이 만들어진 1800년대는 격동의 시대였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체가 앙시앙 레짐(ancient regime)으로 불리는 구질서를 무너뜨리고, 시민으로 구성된 새로운 국가를 형성하기를 열망하던 시대였다. 이러한 소망을 담아 베토벤이 만들었던 교향곡이 3번 교향곡인 <영웅>이다. 그렇다면 이런 시기에 작곡된 피아노 소나타 18번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베토벤은 처음부터 새로운 음악과 형식을 추구했던 작곡가이다. <현대음악강의>에서도 보았듯이 베토벤은 같은 형식과 내용으로 비슷한 곡을 다시 쓰고 싶어 하지 않았다. 피아노 소나타 형식 역시 이러한 새로움에 대한 추구와 연결되어 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은 계속해서 변화를 겪는다. 하지만 베토벤이 시도했던 것은 기존의 형식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형식을 만드는 것이었다.

조성음악은 근원적으로 위계질서를 표현하는 것이고, A-B-A’라는 소나타 형식은 조성적인 위계를 완전히 뒤엎지는 않지만 근대 국가를 향한 새로운 질서를 나타내려고 하지 않았을까. 위계는 있지만 한 사람 ‘군주’에게 예속되는 방식이 아닌 ‘국가’에 예속되는 방식으로의 새로운 질서! 물론 100년 전에 이미 섬나라 영국은 시민 국가를 형성했지만, 유럽 대륙은 여전히 봉건 질서에 묻혀 있었다. 근대 국가는 기존과 다른 새로운 형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스크리아빈

 

스크리아빈의 소나타 환타지 - 액체 근대로의 집입

베토벤 소나타 18번이 근대 국가적 질서를 표현했다면, 스크리아빈이 1900년대 초에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2번은 조성과 형식 자체가 무너지는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소나타 형식은 B 구간에서 자유로운 확장을 시도하다가 결국은 A’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스크리아빈의 소나타 환타지를 들어보면 마지막 부분이 모호하고 구조에 결박되지 않으려는 것 같다고 느껴진다. 

19세기는 계속해서 불협화음이 확장되는 세기였고, 조성적 질서의 중심인 고정조성fixed key이 와해되던 시기였다. 스크리아빈의 앞선 세대인 바그너가 조성의 끝을 보여주었다면, 그와 같은 시기였던 쇤베르크는 고전시대에 형식을 구축하는 재료였던 조성을 아예 해체시켜버렸다. 쇤베르크의 음악은 조성의 위계적 질서에 익숙한 사람에게 ‘민주주의적 음악’에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음악은 누군가에게는 자유의 언어였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죽음의 언어였을 것이다.

스크리아빈은 무엇을 반영하려고 했을까. 스크리아빈은 이미 점점 더 개인화되고 있는 감성적인 인간들의 세계를 반영하려고 했을 것이다. 더 이상 합리적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개인의 탄생! 이 신인류는 다른 누구의 법칙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신의 규칙을 만들기를 바라는 인간이다. 

초기 근대 국가는 감시와 처벌을 통해 만들어졌다. 모든 시민들이 자신의 권리를 제3자인 국가에게 양도하고 법에 따라 감시받고 처벌 받는 방식으로. 푸코는 근대 권력의 속성을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벤담의 ‘원형감옥’을 예로 들었다. 이상하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성장해 온 학교, 회사, 군대 심지어 가족까지도 모두 이런 모델 아래에서 움직였고 살아왔다. 탑 위에서 감시하는 자들과 저 아래에서 감시받는 죄수들! 죄수들은 감시를 받고 있기 때문에 움직이지 못한다. 반면에 이 시기에는 무엇에 대항해야 하는지, 친구들이 누구인지 판별하기는 쉬웠다. 규칙(법, 형식)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형감옥 모델은 더 이상 유동하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이제 우리는 어떤 것이든 오래 지속되는 것들을 참지 못한다. 무료함 속에서 결실을 일구는 법을 우리는 이제 모른다. 따라서 모든 질문은 이렇게 응축된다. 인간 정신은 스스로 만들어낸 것들을 과연 정복할 수 있을까?- 폴 발레리

전단력이 가해지면 다른 부분에 대한 한 부분의 위치에 계속적이고 회복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 변화가 바로 유체의 고유한 특성인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이와 반대로 고체는 전단력이 가해지면 비틀리고 구부러진 채로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지그문트 바우만은 지금의 세계를 액체근대(Liquid Modernity)라고 부른다. 사실 근대는 그 시작부터 어떤 액화의 과정이었다. 마르크스 역시 <공산당선언>에서 부르주아 자본주의 시대를 ‘견고한 것들을 녹이는 것melting the solids’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언급했던 ‘액화과정’은 바우만이 지적하고 있는 ‘액체근대’와 분명하게 다른 점이 있다.

새로운 질서(형식)를 만들려면 기존의 것들을 제거해야 한다. 즉 기존의 액화과정은 항상 새로운 틀, 좀더 단단한 구조, 체제, 질서를 놓기 위한 작업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놓인 새로운 질서는 이전의 질서보다 더 견고해야만(고체적이어야만) 했다. 이런 방식으로 봉건 질서는 부르주아 형상을 따라 새로운 자본주의 질서를 만들어냈다.

여기에 차이가 있다. 바우만이 지적하고 있고, 바로 우리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은 더 이상 아무런 질서, 규칙, 틀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계속해서 앞선 질서를 무너뜨리지만 이는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동하는 세계를 방해하는 경계와 담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라도 살 수 있는 소비의 자유가 넘쳐나는 액체근대에서 점점 공급이 부족해지는 것은 사람들이 안정적인 지향점으로 선택할 수 있는 행동 유형들, 규약들, 형식들뿐이다. 

근대국가에서 정치와 권력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헤어질 것 같지 않았던 국민국가를 유지시키기 위한 평화로원 보이는 한 쌍이었다. 하지만 유동하는 세계에서 정치적 통제는 점점 힘을 잃어갔고, 이로부터 해방된 권력은 불확실성의 근원이 되고 있다. 국가기관은 계속해서 자신의 기능을 다른 곳(민간)으로 이전시키고 있고, 국가는 더 이상 개인의 안전, 복지, 윤리, 건강에 책임지지 않는다. 물론 어떤 예술을 하라든지 말라든지 결코 간섭하지 않는다.

 

자기 기술로서의 예술이자 공동체적 독특성으로의 예술

이제 누구도 질서 확립, 질서 유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는다. 공간적인 냄새를 풍기는 ‘공동체’라는 말은 이미 오래된 낱말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불확실성이 넘치는 지금이야말로 공동체와 철학을 고민해야하는 시대인 것 같다.

푸코는 ‘비판’을 “이런 식으로 통치받지 않으려는 기술”로 정의했다. 사람은 통치와 권력을 떠나서 살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나는 이런 대가를 치르고서는 살지 않겠다, 이런 방식으로는 살지 않겠다는 ‘자기 비판’이다. 푸코가 마지막 시기에 고민했던 것이 바로 이런 문제였다. 아무도 자신을 감시하지 않지만 스스로가 자신을 통제하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된 탈원형감옥의 시대에, 아무런 행동양식과 규범들이 주어지지 않는 시기에 개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고대에는 사람이 살아가는 다양한 방식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합리성의 시대, 과학의 시대인 19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인간이 배운 삶의 방식은 하나로 압축된다. 법(형식)에 예속되는 방식! 예술 형식 역시 하나의 질서를 떠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법에 예속되는 주체’를 형성하는 것은 수십 년이라는 아주 오랜 기간이 걸리는 인간 역사에서 매우 기괴한 삶의 방식이라는 점이다.

푸코의 연구에 따르면 가장 다양한 주체 생성 방식이 탐구된 시기는 로마 제국 시대였다. 2000년 전 모든 경계가 허물어졌던 전지구화된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로마 제국 이전까지 서구인들은 작은 공동체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살아가기 위해 따로 뭔가를 배울 필요가 없었다. 각각의 공동체가 살아가는 것이 다양한 주체형성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국 시대에 다양한 생활 양식들은 파괴되었고, 바로 이때 서구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스토아 학파의 계열들이 이때 나타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그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생활양식으로서 철학을 탐구했다는 점이다.

중세가 오로지 신의 질서 아래에서 예술을 했다면 근대 예술은 국가가 그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어떤 예술도 가능하지만 각자가 직면하는 현실을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현실과의 접점을 잃어버린 예술. 액체시대에 예술은 어떤 길을 가야할까. 아무런 틀도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살아야 하는 개인에게 자유가 짐이 되는 것처럼, 어떤 예술도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예술은 길을 잃어버렸다. 

이제 모두(전체)를 위한 예술은 불가능하다. 사회와 개인 모두가 변했다. 각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드높이고 싶어하고, 또한 이를 규제할 어떤 권력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스스로가 자신의 예술(삶의 양식)을 만들어야 한다. 쇤베르크는 19세기 말 자신이 맞닥뜨린 절망적인 현실을 그대로 인정했다. 그렇다고 탐미주의적인 예술에 안주하지 않고, 아름다운 정원 대신에 황무지에서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음악은 위계적이고 특권적인 온음계로의 회귀가 아니라 12음의 민주적인 방식으로 질서를 재조직해냈다. 

 

 

삶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속에서 삶의 양식(예술)을 고안해내야 한다. 콩브레마을의 고유성이 드러나는 언어를 만들어내야 한다. 언어란 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국 채색화, 클래식 피아노, 작곡, 국악, 그리스 철학, 라틴 댄스가 각자의 독특성을 잃지 않으면서 서로가 지낼 수 있는 방식을 고안해 내야 한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란 게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새로운 길을 낸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몇몇이라도 계속해서 함께 걷다보면 작은 오솔길이라도 만들어지지 않을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길을 함께 묵묵히 걸어갈 친구들일 것이다.

 

2017.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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