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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알튀세르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

by 홍차영차 2017. 1. 18.

마주침의 유물론, 우발성의 유물론






세계를 생성하는 지속적인 마주침(응고)

“비가 온다.”

이렇게 감성적인 문장으로 시작되는 철학책이 있던가. 알튀세르는 아무런 이로움 없이 그저 땅으로 떨어지는 비를 보면서 새로운 유물론의 계보를 완성한다. 에피쿠로스, 스피노자, 마키아벨리, 홉스, 루소, 그리고 맑스, 하이데거와 데리다까지. 그가 나열하는 철학자 각자의 이론을 따라가기에도 벅차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원자들의 마주침, 그것도 지속적인 마주침이 세계를 생성한다는 주장이다.

마키아벨리가 보기에 이탈리아가 민족국가가 되는 것은 한 번의 마주침으로는 불가능하고, 맑스의 눈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그저 돈 많은 사람과 프롤레타리아트가 만나는 것으로 생성되지 않는다. 알튀세르는 반복해서 ‘지속적인 마주침’을 언급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속되는’ 마주침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사건이 발생한다는 것은 우발성과 우발성의 아주 낮은 확률을 강조하는 것인가 아니면 지속되는 마주침이 생성되는 구조 혹은 ‘응고된’ 법칙에 주목해야 한다는 말인가. 두 가지 모두?


필연성의 우연성에서 우연성의 필연성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돈 많은 사람과 노동자의 예외적이고도 우연적인 만남으로 생성된 것인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자본론>에서 보았듯이 맑스 역시 이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고 말한다. (특정 자본가와 특정 노동자의 만남은 예외적일 수 있지만.) 두 인물이 만난 것은 이전의 마주침(응고)으로 인해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우연성이라는 말이다.

알튀세르는 에피쿠로스의 원자를 이야기 하면서 세계의 생성에서 ‘마주침으로 인한 마주침’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바로 앞서도 말했지만 이렇게 하더라도 두 인물의 마주침을 필연으로 만든 마주침, 혹은 세계의 형성을 일으키는 (기원적) 마주침이 무엇인지 궁금해지지 않을까. 하지만 알튀세르의 방식으로는 어떤 마주침도 기원적 마주침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마주침 이후에 지속적이 마주침이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여러번 반복되었지만 중요한 것은 사건은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공백(허공)의 철학

 “어떤 사람들(스콜라)은 세계에서 시작하고 다른 사람들(데카르트)은 인간정신에서 시작하지만 나는 신에서 시작한다.” 현재의 상황에서 무언가를 변혁하고자 하는 사람은 “남들보다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문제 설정, 모든 귀결들을 지배하는 문제”를 설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설정은 어떤 기원, 이유, 근거, 본질로부터 시작되어서는 안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 혹은 전체로서 그 밖에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중요한 것은 지금 현존재로서의 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 지금의 현재를 긍정할 수 있는 힘. 이후의 나, 세계 또한 우발적 마주침에 의해서 새롭게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 긍정적인가? ^^


'17.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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