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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노동(력) - 월급은 노동의 대가가 아니다

by 홍차영차 2016. 6. 24.

노동(력)

- 월급은 노동의 대가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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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의 비판은 차이로부터 시작된다

<<자본론>>이 맑스 이전의 고전경제학자들과 비교하여 갖는 결정적인 차이점은 ‘잉여가치’에 대한 해명이다. 분명 맑스 이전에도 가치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가치의 생산이 노동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했고, 리카도 역시 노동 이외에 어디에서도 가치가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른바 노동가치설이다.

그렇다면 맑스가 <<자본론>>에서 말하는 노동가치설은 스미스와 리카도와 같은 고전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것과 어떤 면에서 다른 것인가? 맑스는 앞서 발견되었지만 정리되지 않은 개념을 이론적으로 정리한 것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맑스는 고전경제학자들이 주장한 노동가치설을 전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여기에서 미세한 차이를 발견한다. 맑스에게 있어서 비판은 항상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존재하는 현상의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것은 ‘노동’과 ‘노동력’의 차이에서부터이다. 맑스에게 노동력의 발견은 잉여가치의 발견이고, 자기증식하는 자본의 비밀을 보여주며, 물신을 깨는 망치가 된다.

고전경제학자들은 가치를 상품 자체의 성질로 여겼다. 상품에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내재해 있고, 이를 드러내는 것이 화폐라는 것이다. (경제학의 시초부터 지금까지 부르주아지를 대변하고 있는) 고전경제학자는 이렇게 가치의 원인이 노동이라는 것은 언급했지만,  여기에서 멈췄다. 그들은 노동이 어떻게 잉여가치[각주:1]를 만들어내는지 말해주지 않을 뿐 아니라, 잉여가치가 노동자, 자본가, 토지소유자에 의해서 정당하게 분배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노동자, 자본가, 토지소유자 모두가 각자의 지분을 생산에 투자하여 공평하게 배당받는다고 말한다.  

맞는 말 같지만 직관적으로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소수의 부자들이 가진 재산은 정당한 것이 되고,  가난한 이들은 ‘능력’과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그럴까? 노동자들은 분명히 열심히 일한 것과 상관없이, 또한 자신의 능력과는 관계없이 자신이 일한것보다 더 적게 받고 있지만, 임금형태가 주는 환상때문에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조차 파악하기 어렵다. 대체 이런 환상과 오해는 어디서, 어떻게 일어나는 걸까? 그리고 이 착취와 잉여가치는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노동과 노동력

고전경제학자가 노동가치설을 주장하면서 보지 못한 것은 바로 ‘노동력’이라는 독특한 상품이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독특하다고 부르는 이유는 이 상품의 사용가치가 가치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노동력의 소비만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

노동력은 어떻게 잉여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먼저 일반 상품의 가치를 어떻게 결정하는가를 파악해야 한다. 처음에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동시에 가지는 물건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는 노동의 이중성과 연결된다. 가령 저고리의 사용가치란 몸을 따뜻하게 해준다는 유용성을 가리키며 동시에 이는 재봉이라는 구체적 유용노동으로 만들어진다. 반면 저고리의 교환가치는 다른 상품과 교환되는 비율인데, 이는 동질의 인간노동력인 추상노동과 연결된다. 즉 교환가치란 그 생산물을 만드는 데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필요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를 생각해 보자. 노동력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노동’과 다르다. 노동력이란 노동의 교환가치이고, 노동력의 사용이 노동이다. 일반상품처럼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를 필요노동시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는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재)생산 비용으로 계산할 수 있다. 

“노동력이라는 것은 인간의 신체, 즉 살아 있는 사람 속에 존재하고 있는, 또 그가 어떤 종류의 사용가치를 생산할 때마다 운동시키는 육체적-정신적 능력의 총체.”이다. 즉 노동력의 (재)생산이라는 것은 “개인 자신의 재생산, 즉 그의 생활의 유지”이고, 오늘의 노동을 마친 노동력의 소유자는 내일도 동일한 힘과 건강을 가지고 동일한 과정을 반복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는 노동자가 매일 매일을 살아갈 수 있는 생활수단의 비용이고, 그 최저 한계는 “노동력의 보유자인 인간이 자기의 생명과정을 갱신하기 위해 매일 공급받지 않으면 안 되는 상품량(생활수단)의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기본적인 의복, 거주할 집, 음식에 대한 비용이 들어가 있으며, 세대를 넘어선 노동의 공급을 위한 자녀양육비용도 포함되어야 한다.

‘노동’은 노동력의 실제적인 사용이다. 일단 노동력이 상품이 되면 얼마를 지불하고 구매했느냐에 상관없이 노동력의 소비는 구매자(자본가)의 재량에 달려 있다. 상품 구매자의 정당한 권리이다. 하지만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노동력의 소비가 노동력의 가치만큼만 생산한다면 노동력을 구매할 필요가 없다. 쉽게 말해서 자본가는 분명 노동의 소비에서 노동력의 (재생산) 가치보다 큰  가치(잉여가치)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야 이익이 발생한다. 반대로 노동자 측에서 보면 노동력의 재생산이 이루어지지 않을만큼 과도하게 노동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노동력이라는 것은 살아있는 인간의 신체 속에 존재하는 것인데, 과도한 노동으로 노동자의 몸이 망가진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육체적, 정신적 능력의 손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자본가가 잉여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은 오로지 노동자의 과도노동에 의해서만 가능할 뿐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자본가가 말하는 ‘잉여’라는 말이 ‘착취’의 다른 이름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맑스 사전에서 잉여가치율=착취율일 뿐이다.

맑스가 <<자본론>>을 집필할 당시, 자본가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시장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었고, 노동력의 가치보다 더 오랜 시간동안 노동을 시키면서 잉여가치를 축적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할 사실은 노동자는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적 유물, 자본주의 생산체제 고유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탄생

노동과 노동력의 차이가 잉여가치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보면 다른 어떤 상품보다도 노동력의 상품화야말로 ‘자본’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이 틀림없다. 즉 노동자가 자유롭게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는 시대가 전제되지 않으면 자본주의라는 완전히 새로운 생산양식의 시대가 도래할 수 없었다. 그렇다며 노동자는 어떻게 자신의 노동력을 팔게 되었을까?

먼저 시장에서 자유로운(free) 노동자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자유롭다는 것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일단 노동자는 자유인(free individual)으로서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처분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노동자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노동력을 처분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여야 하며, 법률상으로는 자본가와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이 더 필요하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 이외의 그 어떤 생산수단도 가져서는 안된다(free of). 다시 말해 노동자는 오직 “자기 신체 안에만 존재하는 자신의 노동력 자체를 상품으로 내놓을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있어야 하고,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그 어떤 생산수단과도 철저히 분리된 상태여야 한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노동자가 자유롭다는 말에서 이 상반된 두 가지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 


산 노동과 죽은 노동

지금까지 노동과 노동력이, 특히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어떻게 잉여가치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펴봤다. 지금부터는 노동력의 소비인 노동이 갖는 특성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먼저 노동과정에서 노동은 크게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노동자의 노동, 노동대상, 노동수단이다. 결국 노동과정에서의 노동이란 노동자가 노동수단을 이용해서 노동대상에 변형을 가해 인간 욕망에 적합한 형태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노동과정에서 생산수단과 마주하는 것은 노동자의 노동이다. 맑스는 이를 ‘살아 있는 노동’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산 노동’은 자기 생명력을 소비해서 정말로 죽은 것들을 살려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노동은 이 물건들을 가져다가 죽음 상태로부터 소생시켜 단순히 가능성이 있는 사용가치로부터 현실적으로 유용한 사용가치로 전환”시킨다. 즉 산 노동은 생산수단과 만나 새로운 가치(생산물)를 만들어 낸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생산수단과 노동의 마주침은 자본주의 사회뿐만 다른 사회에서도 필요한 것이다. 노동과 생산수단의 만남 없이 뭔가가 만들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과정이 갖는 특징은 무엇일까? 자본주의 생산과정에서 산 노동과 마주치는 생산수단도 따지고 보면 과거 산 노동의 생산물임을 알 수 있다. 생산수단이란 결국 과거의 추상노동이 응고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과정이란 현재의 ‘산 노동’과 과거의 ‘죽은 노동’의 만남으로 묘사할 수 있다. 결국 죽은 노동인 생산수단이 새로운 사용가치(잉여가치를 포함하여)를 얻기 위해서는 살리는 노동을 반드시 만나야만 한다. 자본주주 생산체제의 노동과정은 노동자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가’를 위해서 수행된다는 사실! 자본가는 “노동력을 구매함으로써 살아 있는 효모로서의 노동을, 역시 자신에게 귀속된 생산물의 죽음 요소에 합체”시켜 그 결과물을 취한다. 또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결과물을 자신이 취할 수 없게 되어 노동에 의한 소외가 발생하게 된다. 자본주의 노동과정에서는 내가 생산한 음식, 집, 자동차, 옷이 나와 전혀 관계 맺을 수 없는 슬픈 현상이 매일 매일 반복된다.


필요노동과 잉여노동

맑스는 상품이 제작되는 노동과정을 분석하면서 하나의 비밀을 발견했다. 즉 맑스는 정가를 치르고도, 등가교환을 하면서도 잉여를 챙길 수 있는 특별한 상품인 ‘노동력’에서 해결책을 본다. 그의 분석을 따라가 보면 잉여가치란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력의 사용(노동)이 만들어낸 차이다. 그리고 자본가는 이 차이를 극대화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마련한다. <<자본론>>에 나오는 수 많은 장치들[각주:2]이 이러한 자본가의 노력을 보여준다.

그런데 왜 노동자들은 자신이 생산한 잉여가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잉여가치율=착취율이 되어버리는 것일까? 왜냐하면 우리가 ‘가치생산물’과 ‘생산물의 가치’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가치생산물이란 노동과정을 통해서 새롭게 추가된 가치를 말하고, 생산물의 가치란 생산과정 이후에 나타나는 생산물 전체의 가치를 말한다. 가치생산물과 생산물의 가치를 혼동하게 되면, 자본가들의 관심사인 이윤율과 잉여가치율을 혼동하게 되고 노동자들이 얼마나 착취당하는지를 볼 수 없게 된다.

자본가들의 목적은 잉여가치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그들이 투입한 자본과 잉여가치의 비율인 이윤율(p=m/(C+V))이다. 하지만 자본가가 아닌 우리는 생산과정에서 실제로 추가된 가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즉 노동력의 가치(v)와 노동과정에서 그것을 넘어 생산한 가치(m)의 비율, 잉여가치율(m/V)이 중요하다. 잉여가치율에서 중요한 것은 가치생산물에서 잉여가치가 차지하는 비율이다. 이 비율을 좀 더 확실히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가치생산물 만들어내는 노동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필요한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가를 위해서 생산하는 노동이다. 그리고 맑스는 전자를 필요노동(시간)으로, 후자를 잉여노동(시간)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정의하면 잉여가치율이 왜 착취율이 되는지를 좀 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노동자는 오로지 노동력의 가치, 즉 필요노동시간에 대한 임금을 지불받는다. 즉 잉여가치율은 필요노동에 대한 잉여노동의 비율인데, 이것은 곧 노동자의 노동 착취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잉여가치율은 자본에 의한 노동력의 착취도, 또는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도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다.”




모든 것을 생산하지만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

잉여가치율=착취율이라는 사실과 노동이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어떤 면에서 중요할까? 그 중요성은 실제로 모든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노동자이지만 노동자는 그 어떤 것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실감하는데에 있다. 또한 노동자가 자본가의 선한 의지 혹은 노동의 대가에 따라서 임금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환상을 깨는데 있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생산과정에서 '소비'한다. 이 부분에서 노동자는 생산과정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면서 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에 노동력의 소비는 당연히 매우 '생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맑스는 이 뿐만 아니라 노동자가 개인적으로 자신이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데이트를 하며, 멋진 옷을 사는 것, 헬스를 하고 여행하는 하는 개인적 소비 역시 '생산적'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본의 재생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분명 '노동력의 재생산’이고, 노동자가 먹고, 입고, 자는 것이 바로 ‘노동력 그 자체’를 생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노동자는 ‘공장 안’에서 노동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공장 바깥’에서 휴식을 취할 때도 너무나 '생산적'인 인간이 된다. 다시 말해 하나의 계급 입장에서 보면 노동자 계급의 소비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모두 생산적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자의 개인적 소비는 단순히 '노동력의 생산'에만 머물지 않는다. 노동자는 살아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상품을 구매하고 소비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과정에서 노동자는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야 하는 신세가 된다. 노동자의 탄생에서 언급했던 이중적 의미의 자유가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유롭게 소비하며, 또한 다시 박탈당한 노동자로 돌아가기 위해서 생활수단을 자유롭게 구매하고 소비해야만다. 이를 사회적 관점으로 확대해 보면 '빈곤'이란 자본주의 안에서 게으른 사람, 능력없는 사람이 처하게 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작동하기위한 필수적인 구성요소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노동’과 ‘노동력’이라는 너무나 자명하게 동일한 것으로 여겼던 둘 사이의 미세한 차이를 구분했을 때 가능했다. 맑스 이전의 고전경제학자들은 분명 생산의 측면에서 노동을 바라보았지만, 자본주의 생산 체제 고유의 위상을 바라보지 못했다. 혹은 바라보려고 하지 않았다. 맑스의 비판은 그의 ‘특별한 눈’에 있다.  그리고 이 특별한 눈은 현상을 현상 그대로 보는 것(감성)과 사람들이 존재하는 현상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지성), 이 둘 사이의 차이가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를 비판적으로 고민해 볼 때 가능할 수 있다.


2016. 06. 24



  1. 잉여가치는 독일어 Mehrwert의 번역어로, 근대 시민사회에서 사용되던 일상어였다. (plus-value는 1457년 이후, Mehrwert는 1809년의 사전에 등장) 예를 들어 ‘부동산 가치의 증가분’이라든가 ‘국고세입의 자연증가분’과 같은 일정액에 부가된 가치량을 의미한다. 이런 면에서 Mehrwert의 번역어인 잉여가치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즉 Mehrwert는 남는 부분이라는 잉여가치라기보다는 ‘증가’가치이다. 최초의 가치를 넘어서는 초과분이 Mehrwert이고, 이런 한에서 Mehrwert를 가져오는 것은 모두 ‘자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즉 자본이란 Mehrwert를 낳는 가치이다. 맑스는 일상어인 Mehrwert를 비판적으로 새롭게 파악하여 증가가치의 무비판적 사고를 강제하는 근대 시민사회의 메커니즘을 해명했다. (<맑스사전>, 도서출판b, 잉여가치 참조) [본문으로]
  2. 절대적 잉여가치, 상대적 잉여가치, 협업과 분업, 공포의 집-공장, 기계제 생산, 시간제 임금/성과제 임금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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