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양평문화재단에서 오프라인 강의를 합니다. 지난 4~5년에 걸쳐 이야기했던 '문자와 정신공간'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하는 강의가 될것 같습니다. 예술, 철학, 정신분석을 연결시켜서 현재 나의 정신공간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확인해보고, 현재의 정신공간을 구성했던 자폐적 경험에서 열린감각으로 어떻게 나갈 수 있는지를 생각해봅니다.
이번 강의는 양평문화재단본관이 아니라 아신역 근처에 있는 아신갤러리에서 진행됩니다. 기차 두칸을 이어놓은 곳인데 한 곳에서는 주로 작은 전시가 열리고, 다른칸에서는 커뮤니티 룸이 있는데 바로 이곳에서 진행합니다. 주변에 살짝 산책하기 좋은 곳들 - 산을 뚫어놓은 터널 - 이 있어서 간단히 산책도 해보려고 합니다. 홈페이지에는 올려 놓지 않았는데, 이번 강의를 생각하면서 써본 공지문도 함께 올려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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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나라는 장르의 탄생 - 자폐적 경험과 열린감각
장소 : 양평문화재단 아신갤러리 (아신역 근처)
일시 : 2026. 11.4(수) ~ 12.2(수) (5회)
10:00 ~ 12:00
https://ypcf.or.kr/shop_view/?idx=205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이 되는가” - 니체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사람을 보라>의 이 부제다. 그런데 이 질문이 좀 낯설다. 아니 모순처럼 들린다. 이미 내가 태어나서 살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질문이 가능할까. 이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면 주어진 (법과 질서)대로 그냥 산다고 해서 ‘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니체는 이미 이 책의 서문에서 스스로 “이제까지 인류에게 제기된 적이 없었던 가장 어려운 요구”를 해야할 때라고 말한다. 니체는 주체 생산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니체 말대로라면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바라는, 회사가 요구하고, 선생님과 친구들이 원하는 모습일 뿐이다. 사회, 부모, 회사, 선생님, 친구의 요구라는 것은 한 마디로 대타자의 법이라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 이후 이성과 과학이 중심이 된 사회 속에서 우리는 일반성과 보편성을 기준으로 주체(나)를 생산해 왔다. 좀 더 도식적으로 이야기해보자면 법에 종속된 주체이고, 공산품처럼 대량생산된 (노동자) 주체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이후로 이러한 주체(생산)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니체, 프로이트, 맑스는 이에 대해서 각자의 답을 시도했다.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만의 독특성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느끼고 있으며 이러한 독특성을 배제하지 않는 삶을 원한다. 푸코의 말을 빌어보자면 2026년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개개인의 주체성, 자신만의 독특성의 요구는 어떻게 생겼을까? 또한 높은 주체성을 갖는 것은 어떤 어려움을 발생시켰을까?
“이 그림은 망친 거야. 붉은 물감이 캔버스에 흘렀거든. 처음에는 화를 냈는데 점차 그 얼룩이 맘에 들더군. … 앞은 완벽한 사실주의 세계였고, 그 뒤에는 무대장치의 찢어진 캔버스 뒤편처럼 뭔가 다른 것, 신비롭고 추상적인 것이 보였지.” 그녀는 말을 멈추더니 다시 덧붙였다. “앞은 파악할 수 있는 거짓이고, 뒤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였지.”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06쪽)
‘인생이란 이해 가능한 거짓말을 뒤집어 쓰고, 이해 불가능한 진실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이라는 밀란 쿤데라의 말은 현재 우리의 모습(불안과 소외)을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삶은 전할 수 없는 것을 전하려는,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시도처럼 느껴진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자신에게 일어나는 충동을 그 자체로 전달할 수 없는 것을 자신의 독특성으로 갖고 있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주체성이 높다는 것은 내면의 복잡성이 높아졌다는 뜻이고, 속마음과 행동의 간극이 넓어지면서 자신의 속마음을 알기 어려워졌다는 뜻이다. 자신의 독특성을 인정하면서, 속마음과 행동의 간극을 잘 연결시키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나만의 삶이 방식을 발명해야 한다.


다른 삶의 발명? 어렵게 생각할 것은 없다. 다른 삶은 다른 신체를 요구하고, 다른 신체란 곧 열린 감각으로 다른 리듬을 신체에 새기는 작업이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소한 몸짓과 동작, 걸음걸이의 변화, 그리고 감각의 회복! 놀랍게도 언제부턴가 우리는 생동하는 세계와 교류하지 않고 오로지 인간 문명이 만들어낸 것들과만 교류하고 있다. 우리가 다시 신화, 예술, 철학, 정신분석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문자 이전의 구술 문화속에서 우리는 아직 열린 감각으로 살아있는 세계와 역동적으로 교류하며 자신을 표현할 수 있었다. 자연의 신비에서부터, 성스러움, 비문자적으로 드러나는 삶의 불가해성을 표현하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이 시대에는 성스러운 것을 있는 그대로 성스럽게 감각하고 받아들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문자적 세계를 비문자적으로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자가 발명된 이후 사람들은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면서 세계를 속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고, 측정할 수 없는 것을 무가치한 것이며, 말로 할 수 없는 감정과 무의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팽배해졌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비문자적인 세계의 신호들을 무시하거나 그 자극들을 신체적으로 해소하지 못하게 되면서정신적인 불안을 겪게 되었다. 구술 시대와 다른 방식으로 비문자적으로 자신을 표현할 역량과 기술-예술을 익힐 필요가 있다.
본래 우리는 몸의 사유를, 예술적 독창성을 장착하고 태어난다. 하지만 너무 오랜 가뭄에 비틀어져버린 나무처럼, 과학적, 이성적, 통계적인 논리에 메말라버렸다. 이제 예술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예술은 생존에 필수적인 일상기술이어야 하고, 정신분석은 자기 이해와 세계 탐구에 기본이 되었다. 지금과 다른 정신공간, 신체적 사고라고 할 수 있는 신화적 정신공간을 탐구하면서 열린 감각으로 나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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