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뒷세이아>의 또 다른 이름은 모험이다.
삶은 곧 모험이고, 모험을 멈춘다는 것은 곧 죽음이라는 것. 모험할 때 중요한 것이 환대의 역량이다. 어떻게 환대할 것인가, 어디까지 환대할것인가. 모두를 환대하는 것이 가능한가?
<오뒷세이아>에서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섬, 사라진 사람들>이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환대와 딱 맞는 장면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도망자, 씨족을 죽인 탄원자를 흔쾌히 받아들이는 이 장면을 보면 이 영화가 떠오른다. 인터넷의 발명 이후 제2의 인생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일면으로 아주 좋다. 학폭을 행했던 사람이 결과적으로 처벌을 받고, 범죄를 숨겼던 사람도 결국엔 밝혀지니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정말 모든 것이 밝혀지는 것이 좋은 것인가? 30년, 40년 인생을 시간순서대로 다 추적해서 현실에서 인과응보를 받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오뒷세이아> 15권을 보면 한 탄원자가 텔레마코스에게 배를 태워달라고 부탁한다. 놀랍게도 이 탄원자는 스스로가 살인자, 그것도 씨족을 죽인 살인자라고 고백하다. 진짜 말이 안되는 건 이런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텔레마코스는 이 탄원자를 흔쾌히 태워주고 이타케에서 융숭히 환대하겠다고 약속한다. 살인자를 왜 받아주지? 이게 뭐지?
호메로스 시대만이 아니다. 이후 그리스 비극 시대, 즉 아테네 황금시대의 비극에도 환대의 이야기(아이스퀼로스<탄원하는 여인들>)가 나온다. 탄원자를 받아주면 전쟁이 일어날 것이 확실한데도 그 비극에서는 탄원자를 받아들이면서 환대를 약속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환대가 뭐길래, 자신의 목숨 아니 나라의 존망까지 위험에 빠뜨리면서 환대한다는 것이 가능한 말인가?
<섬, 사라진 사람들>을 보자.
여기에 배성우(상호역)가 염전 노예로 나온다. 거의 채찍을 맞으며 노동을 착취당하고 있다. 우연찮게 기자가 염전노예를 취재하고 진실을 밝히려고 노력한다. 아뿔사, 진실에 가까워지면서 염전에서는 끔찍스러운 살인이 벌어진다. 염전노예로, 혹독하게 오랜 기간 착취당한다고 생각했던 상호는 사실 오래전 연쇄살인을 저지른 인물이었다. 만약 기자의 선의가 없었더라면, 진실을 찾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 누구도 모른다. 결국 상호는 다시 살인을 저질렀을까 아니면...
역사적으로 환대가 사라진 세계는 없다.
인류사는 끊임없는 선물과 환대를 통해 이뤄졌다. 다만 그 형태가 달라졌을 뿐이다. 다른 방식의 환대와 선물의 형식이 있었을 것이다. 2026년 환대를, 선물(증여)를 어떻게 되살리고 있는지, 되살려야 하는지 <오뒷세이아>가 다시 질문을 주는 것 같다.
그때 먼 데서 온 한 사내가 가까이 다가왔으니
그는 사람을 죽이고 아르고스에서 도망쳐 오는 중이었다. (15권 223~224행)
......
신과 같은 테오클뤼메노스가 그에게 대답했다.
"그대처럼 나도 고향을 떠났으니 씨족 중 한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오. 말을 먹이는 아르고스에는 그의 형제들과 친척들이
많이 있어 아카이오이족을 강력히 통치하고 있소.
...... 내 도망자로서 그대에에게 탄원하건대 그대는 그들이 나를 죽이지
못하게 배에 태워주시오. 그들은 아마 나를 뒤쫓고 있을 것이오."
슬기로운 텔레마코스가 그에게 대답했다.
"가기를 원하신다면 균형 잡힌 배에서 그대를 밀어내지 않겠소.
자, 따라오시오! 이타케에서 우리는 그대를 최대한 환대할 것이오. (15권 271행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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