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홍보 - 철학, 예술 그리고 정신분석의 상관관계
모집) 멍때리기의 철학 - 의식에서 무의식의 철학으로 (8/22~)
: 철학, 예술, 정신분석의 트라이행글 (첫 강의 : 8/22(금), 저녁 7:45 ~)
'멍때리기의 철학' 혹은 '삶의 조건으로서 거짓'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대답하다 보면 여기에서 다시 '나'라는 것은 흔히 말하는 '자아'를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프로이트가 이야기했던 '무의식'을 말하는 건지 다시 질문하게 됩니다. 자아 혹은 무의식은 오로지 나에게만 관련있는건지 주변의 사물이나 사람들의 생각들과 연결되는 것인지 다시 또 질문하게 되죠. 어쩌면 강의를 듣고 나서 답을 발견하기 보다 피할 수 없는 질문을 안고 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철학'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이런 질문에 대한 첫번째 대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탐구하는 거죠. 그런데 이런 질문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나타나려면 우선 동물들과 다른 나, 집단(의식)과 다른 '나(self)'가 발명되어야 합니다. 집단(의식)과 다른 나의 발명은 분명히 '문자(littera)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금 내가하는 생각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나의 생각을 고정시켜서 비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멍때리기의 철학'은 문자와 정신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되고, 또한 구술성과 문자성을 다루게 됩니다.
철학이란 개념이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 문자는 보통 기원전 8~9세기경 발명되었다고 여겨지는데, 소크라테스는 이로부터 삼사백년 뒤의 인간입니다. 즉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문자를 쓰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시대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많은 그리스인들은 집단의식과 다른 나를 당연하게 생각했고, 또한 자신의 속마음과 다른 말과 행동을 하는데도 익숙했다는 뜻입니다.
당시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이 우두머리로 불렸지만 스스로는 지혜를 사랑하는자(philia+sophia)라고 생각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왜 아테네의 아고라에서 시민들을 불편하게 하는 질문을 했을까? 그들이 약속(문자)와 다른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에게해 전체의 평화를 원한다고 하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고, 또한 아테네 내부에서도 이런 위선들이 계속해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속마음과 행동 사이의 간극을 다시 이어붙이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구술성의 인간이라고 여겨지는 호메로스적 인간의 대표인 아킬레우스와 비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인 바로 '철학'입니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철학이 탄생하던 시점에는 '신화의 힘'이 (쇠퇴했지만)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난데 없이 여기서 왜 신화를 이야기하는가? 왜냐하면 고대로부터 신화는 총체적인 인간 삶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로부터 전래되어온 신화는 아름다운 싯구, 기억하기 좋은 싯구로 전승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화를 재현하는 작업들은 그 시대의 예술적 역량들을 드러내줍니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렸던 디오뉘소스 비극 축제를 떠올려보면 됩니다. 우리나라의 굿을 떠올려봐도 좋습니다. 굿을 연다는 것은 다양한 문화예술적(음악, 문학, 미술, 춤 등등) 역량을 드러내는 작업이기도 했습니다.
문자가 발명된 이후라고 하더라도 중세까지는 속마음과 행동의 간극이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문자를 읽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거의 중세 이후까지도 문자를 읽는다는 것은 통상적으로 통독(낭독)을 의미했고, 선창자의 말을 따라 읽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만 개별적이고 독자적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즉 개인과 개인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12세기 개인적으로 문자를 읽을 수 있는 (띄어쓰기, 마침표, 쉼표와 같은) 다양한 기술들이 발달하면서 나와 다른 사람들의 차이, 속마음과 행동의 간극이 급격하게 커졌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에서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선언을 하게 됩니다.
역설적이게도 데카르트가 이성과 의식을 강조하면서 선언한 것이 '정신분석'의 출발점이 된 것입니다. 데카르트의 선언은 곧바로 의식적인 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만이 '나'라고 여기게 되었고, 충동적이고 제어할 수 없는 무의식적인 정념들은 무시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근대철학의 중심을 이어온 데카르트와 칸트철학은 선을 넘을 정도로 이성만 중요하게 여기면서 정신적인 불안을 초래하게 만들었습니다. 니체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이 19세기에 동시에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이성과 의식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갖게 된 이유입니다.
데카르트의 선언과 함께 보야할 점이 바로 신화에 대한 관점입니다. 이성과 합리의 측면에서 '신화'만큼 무용한 것은 없습니다. 효율성 측면에서도 아무런 '의미'를 생산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비효율적이며 감성적으로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신화를 허용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신화와 연결해서 과학의 이름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들 - 연금술이라든지, 유령, 다양한 신화들은 무시받게 되었고, 점차적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정신의 불안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심리적인 것은 보이지 않고 증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근대의 예술이 다양한 분야에서 꽃을 피우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신화적 사고가 더이상 허용되지 않는, 아니 자기 스스로조차도 용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기도 모르는 내면의 충동, 알 수 없는 마음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평생동안 억눌러서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사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술은 합리성의 시대, 과학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17세기 이후부터 불타오르기 시작합니다. 클래식 음악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종교미술에서 벗어난 그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하면서 나타났습니다. 춤과 문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놀랍게도 과학이 점점 더 발전할수록 예술의 힘은 커졌습니다. (2025년 한국의 상황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성 중심의 시대에서 예술 이외에 자기 내면의 충동들을 해소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문자와 같은 기술이 점점 더 발전할수록 개인의 주체성, 즉 자신만의 독특성을 인지하고 타자와의 차이점을 크게 보게 되는 상황 속에서 각각의 개인들은 압력을 받게 됩니다. 개인의 고유성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문제는 타자와의 관계란 거의 언어를 통해서 이뤄지는데,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내면에 계속해서 억압된다는 사실입니다. 속마음을 아주 사실적이고 명확하게 말할 능력이 없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내면의 (한편으로 폭력적이고 성적인) 충동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롭게 탄생한 것이 바로 '정신분석'입니다. 프로이트는 철학자들을 일종의 강박증에 걸린 사람들이고 했는데, 크게 보면 '정신분석' 역시 철학의 탄생처럼 '속마음과 행동'의 간극을 이어주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철학과 정신분석의 연결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라캉 이후의 철학이 정신분석을 껴안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런 시점에서 예술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근대의 예술은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철학적이며 동시에 정신분석학적 증상입니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보면, 철학의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였습니다.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자기분열, 즉 의식과 무의식의 분리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신분석학의 최종질문역시 이것입니다. 프로이트-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자아'를 상상적인 것으로 이야기하면서 '무의식적 주체'를 대면하기를 시도합니다. 물론, 이것은 분석가가 아니라 환자라고 불리는 분석주체에 의해서 가능합니다. 즉 정신분석은 자기도 몰랐던 자기 - 무의식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신의 고유한 특성으로서 무의식과의 대면(face to face)를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이러한 시도는 21세기 예술이 가고 있는 방향과 일치합니다. 예술의 유일한 기준이라는 것은 독창성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독창성을 어디서 오는가?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오로지 나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이점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술은 새로운 도전을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강의에서 해야할 내용을 모두 이야기한 것 같네요.
하지만 이러한 모든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신체성으로 구축하지 못하면 아무 의미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멍때리기의 철학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일입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옮겨가고 싶다는 욕망의 구축!
너무 커다란 기대도 말고 그냥 들어본다고 생각하면 좋겠네요. 한두분 더 신청해서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
모집) 멍때리기의 철학 - 의식에서 무의식의 철학으로 (8/22~)
: 철학, 예술, 정신분석의 트라이행글 (첫 강의 : 8/22(금), 저녁 7:4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