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줄만들기 - 오래된 미래의 신성함
얼마전에 희박작가의 전시에 대한 글을 썼다.
신성함의 조건에 대한 작가의 주제가 나의 관심과 맞닿아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과학과 이성이 시대의 유일한 척도가 된 이후 잃어버린 것이 '신성함'이라는 생각때문이다.
짧게 보면 지난 100년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은 세상에서 쓸모없는 것으로 버려졌다.
그냥 버려졌다기보다는 혐오와 경멸의 눈길을 받으면서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정말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쓸모없는 것들일까? 여기서의 쓸모란 무엇일까.
신성하게 여겨졌던 많은 것들이 속된 것이 되었다.
과학적으로 분석하면서 비가 내리는 것은 오로지 압력, 온도, 습도에만 관련된 생명력없는 속된 것이 되었다. 우주로 로켓을 쏘아올리고, 마이크로의 세계까지 볼 수 있는 현미경을 발명하고, 또 심해까지 내려갈 수 있는 잠수함 덕분이다. 산신령은 헛된 것이고, 바다의 용망은 망상이 되었고, 오래된 물건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은 정신병적 증상이 되었다. 과학과 이성적 사고 덕분에(?) 세상의 모든 신성한 것들은 발가벗겨지면서 속된것이 되었다. 우리는 지금 신성한 것들을 잃어버린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나라는 불과 50여년 전에도 신성한 것을 신성한 것을 신성한 것으로 인정하는 세계였다. 산을 오르기 전 알 수 없는 존재에게 안전한 등산을 기도했고, 어머니들은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누군가 - 신성한 존재 -에게 건강과 행복을 기원했다. 이뿐 아니다. 할머니가 쓰셨던 작은 책상과 골무에는 여전히 할머니의 일부가 들어가 있으며, 오래된 나무에는 땅의 기운과 지역을 지켜주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맞다. 우리에게는 신성한 것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신성한 것들을 잃어버린 세계. 하지만 여전히 희망은 있다.
새로운 방식으로 신성한 것들을 바라보고 일상에서 다시 신성한 것들의 영역을 만들고 지키는 '믿음'을 생산할 수 있다. 신성한 것을 믿는것은 미련하고 비과학적이고 몽매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신성한 것의 영역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불확신한 영역을 불안으로 보지 않고, 더욱 더 넓어진 자신의 상상과 행동, 풍요로운 삶의 토대가 될 수 있다.
희박작가와 함께한 금줄만들기에서 오랜만에 이런 오래된 미래의 신성함을 경험했다.
너무나 일상적이고 흔한 명주실인데 오랜만에 이 명주실덩이를 묶고 엮고 꼬면서 잃어버린 감각이 돌아왔다. 너무 오랫동안 화학제품으로 만들어진 실과 옷을 입으면서 잃어버렸던 감각. 아주 단순한 명주실을 가지고 금줄을 만드는 작업을 통해서도 이런 감각의 회복이 가능하다는 것. 이런 행위 자체가 바로 '예술'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