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스토리

시가 고픈 새벽에 - 장 그르니에 <섬>

홍차영차 2025. 6. 9. 09:59

그럴 때가 있다. 한없이 시를 읽고 싶을 때.

너무나 훌륭한 철학책을 읽고, 흥미로운 소설이나 영화를 보더라도 이러한 충동은 메꿔지지 않는다.

더 놀라운 점은 이런 충동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시가 잘 읽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무 시를 읽는다고 해소되는 것도 아니다.

 

배고플 때 뭐라도 먹어볼려고 냉장고를 뒤지는 것처럼 그렇게 책장을 뒤졌다.

어떤 시를 읽으면 이러한 마음이 채워질 수 있을까.

시집들이 있는 책장을 보면서도 고를 수가 없다. 몇권의 시집을 들고 앉았다.

김사인, 허수경, 신수형의 시집을 펼쳐본다. 시집을 권해준 친구들에 고마운 마음이 든다.

 

새벽에 니체를 읽고 나서 허기(虛飢)가 더 진다.

책상 앞엔 이미 몇권의 시집이 있지만 또다시 책장을 뒤져본다. 장 그리니에의 <섬>과 <카뮈를 추억하며>가 눈에 들어온다.

곧바로 <섬>을 읽어본다.

 

 

 

알제에서 내가 이 책을 처음으로 읽었을 때 나는 스무 살이었다. 내가 이 책에서 받은 충격, 이 책이 내게, 그리고 나의 많은 친구들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 오직 지드의 <지상의 양식>이 한 세대에 끼친 충격 이외에는 비길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섬>이 우리들에게 가져다준 계시는 또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 사실 우리는 모랄이라는 굴레에서 해방되고, 지상의 풍성한 열매들을 노래할 필요를 새삼스럽게 느낄 형편은 아니었다. 지상의 열매들은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빛 속에 열려 있었다. 입으로 깨물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우리들 중의 몇몇 사람들에게 가난과 고통은 물론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이었다. 다만 우리들은 우리들의 피끓는 젊음이 온힘을 다하여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세계의 진실이란 이 세계의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이 나누어주는 즐거움 속에 있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감각 속에서, 세계의 표면에서, 빛과 파도와 대지의 좋은 향기 속에서 살고 있었다. (장 그르니에 <섬>에 있닌 알베르 카뮈의 '섬에 부쳐서' 中)

 

신기하다.

거의 30년 전에 샀던 책이 이제 읽힌다.

아마도 그때는 이 책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위안을 받았던 것 같다. 장 그르니에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저 이쁜 초록색이 있는 표지와 '장 그르니에'라는 작가의 이름, 발음 때문이었던 것 같다. 프랑스에 대한 선망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펼쳐서 보니 지금까지 한번도 제대로 읽지 않았던 것 같다. 깨끗한 표면이었고, 오랜 시간때문에 종이 바랬을 뿐이다. 느낌이 좋다. 30년을 묵혀야 읽히는 책이었던가? 1959년쯤에 쓰인 것을 보니 카뮈가 죽기 얼마 전이었다. (장 그르니에 두번째 선집은 <카뮈를 추억하며>이다.)

 

그후, 나는 왜 한 가지는 다른 한 가지에 잇따라 나타나는 것인가를 알려고 애를 써왔다. 몸과 혼으로 알려 하지 않고 지능으로 알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가지는 잘못된 생각으로 인하여 나는 이것이야말로 철학자들이 '악의 문제'라고 부르는 바로 그 현상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보다 더 깊고 심각한 문제였다. 내 앞에 나타난 것은 파멸이 아니라 공백이었다. 입을 딱 벌린 그 구멍 속으로 모든 것이, 송두리째 모든 것이 삼켜져 버릴 판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사물들이 지니고 있는 현실성이란 실로 보잘것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생각을 되씹어보기 시작했다. (장 그리니에 <섬> 1판 1쇄 28쪽)

 

서문처럼 쓰여있는 카뮈를 문장들을 보자마다 뭔가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섬>에 있는 첫번째 글인 '공(空)의 매혹'을 보면서 이런 감정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대체 나는 여기에서 무엇을 읽었던 것일까. 무엇을 보았기에 그런 무너지는 듯한 느낌들이 메꿔지는 걸까.

프랑스어도 표음문자고, 한글 역시도 표음문자다. 이 문자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언어는 자의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나는 여기에서 무엇가를 읽었고 전달받았다. '공백'이란 프랑스어 vanité라는 말(기표)은 원래 자신이 표현하려는 충동의 왜곡일 수밖에 없다. vanité를 한글로 번역하면서는 또 한 번의 왜곡과 거짓이 생길수밖에 없다. 이렇게 왜곡과 거짓을 통과한 글을 읽으면서 나는 무엇가를 전달받는다. 어떻게 이런 '공백'의 전달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단어와 단어 사이의 빈칸, 문장과 문장 사이의 공백때문일까.

 

이건 시가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시적인 아름다움, 공백의 충만함을 발견했다. 이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농담 한 송이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한 사람의 가장 서러운 곳으로 가서

농담 한 송이 따서 가져오고 싶다

그 아린 한 송이처럼 비리다가

끝끝내 서럽고 싶다

나비처럼 날아가다가 사라져도 좋을 만큼

살고 싶다

출처 입력

 

 

시를 함께 읽을 방법을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