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오나요?
최근에는 정신병(동)에 관한 영화나 드라마가 심심찮게 나온다. 그 중에서도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2023)와 같은 최근 드라마를 보면 '정신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인공으로 나온 박보영은 정신병동에서 근무하는 간호사인데 환자에 대해 진심(?)으로 마음을 쏟다가 스스로 정신적인 문제를 갖게 되고 정신과에 입원하게 된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정신과에 입원했던 주인공은 나중에 다시 정신과의 간호사로 일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정신병력이 있는 사람이 간호사로, 그것도 정신과의 간호사로 일한다는 것이 가능하가? 혹은 맞는 것인가?
<라캉과 정신의학> 2부는 라캉 정신분석학이 나누는 3가지 진단(신경증, 정신병, 도착증)에 대한 실제적인 증상들을 보여준다. 신기하게도 브루스 핑크는 2부의 첫 시작을 '정신병'부터 시작한다. "임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정상인 대개가 신경증적"(137)이라는 말을 떠올린다면, 왜 출발이 '신경증'이 아니라 정신병일까 묻지 않을 수 없다.
https://cafe.naver.com/afterworklab/1627
정신병의 가장 큰 특징은 폐제(foreclosure)이다. 왕을 그 자리(지위)에서 끌어내린다는 폐위를 떠올리면 된다. 그렇다면 정신병은 무엇을 끌어내려서 없애는 것일까? 바로 '아버지의-이름'이다. 1) 정신병자에게 '아버지의-이름'이 작동하지 않는다. 다르게 보자면 상징계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정신병의 정의를 듣다보면 곧바로 "정신병은 어떻게 생기는지" 그 기원을, 발생이 궁금해진다. 하지만 브루스 핑크는 기원과 발생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는 '정신병'의 특징들과 증상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계속 떠오르는 '왜 정신병이 생기는가'라는 질문을 버릴 수는 없다.)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의-이름'은 부권적 기능으로서 '상징적인 기능'을 하는데, 이 말은 가족에 아버지가 있는가 없는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아버지가 없다고 '정신병'이 생기는 것도 아니지만, 아버지가 존재한다고 해서 '정신병'에 걸리지 않는 것도 아니다.
또한 '아버지의-이름'은 대타자의 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거울단계에 형성된 상상적 자아에게 해도 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령하고 억압하는 법! 라캉에 따르면 (이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정신병을 비롯한 진단은 거울단계 이후 오이디푸스 단계를 통과하면서 형성된다. 라캉에 따르면, (오이디푸스 단계를 통과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는) '분석을 아무리 오래한다고 하더라도 정신병의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라캉의 경험상 아직까지는) 사실상 '치료'란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정신병 진단을 하는 가장 큰 특징은 '환각'이다. 하지만 라캉이 보기에 '환각'만으로 정신병임을 진단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신경증인 강박증, 히스테리 환자 역시 '환각' 증세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불할 수 있을까? 환각 증세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환각을 '확신'하는가의 문제다. 2) 정신병자는 의심하지 않고 (환각을) 확신한다. 또한 정신병자에게 그 환각이 자신의 삶에서 무언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신경증자의 가장 큰 특징은 의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놀랍게도 근대적 인간을 정의한 데카르트의 선언 -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근대적 인간이 바로 '신경증자'임을 선언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의 <성찰>에서 '생각하는 나'라는 것은 끊임없닌 '회의하고 의심하는' 나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정의때문에 '신경증'자가 정상인(?)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신경증자도 환각을 경험한다. 하지만 신경증자는 이 환각이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의심한다. 그리고 신경증자 중에서도 강박증자가 경험하는 환청은 주로 내면의 목소리(초자아), 내면화된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정신병을 진단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언어 장애가 존재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라캉 <세미나 3> 106쪽)
신경증자가 언어 속에 거주하는 자라면, 정신병자는 언어가 그 속에 거주하고 그를 소유하는 경우이다. (284쪽)
출처 입력
3) 정신병자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언어 장애다. 언어의 본질적인 특징은 바로 은유인데, 정신병자는 언어의 은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버지의-이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바로 최초의 은유라고 할 수 있는 대타자의 법'을 받아들이기는 것이기 대문이다. 그래서 정신병자는 새로운 은유를 고안하지 못한다. 정신병자들이 쓰는 은유는 다른 사람들이 썼던 '은유'를 모방할 뿐이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모방을 통해서 어느 정도 일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신기한 점은 정신병자에게 은유보다 '신조어'를 만드는 것이 훨씬 쉽다는 사실이다. 은유의 구조를 갖는 언어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정신공간이 다르다) 아예 새로운 '단어'- 자신만의 단어를 만드는 것이 편하다. 그리고 이 단어는 일반적인 언어 처럼 다른 단어를 가리키지 않는다. 어떤 단어를 사전에서 찾고 이해하려면 끊임없이 무한대로 연결되는 의미들의 연쇄 속에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정신병자가 만드는 새로운 단어는 곧바로 사물 그 자체를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단어들은 만지고 먹고 파괴할 수 있는 '사물'처럼 작동한다.
정신병의 가장 큰 특징은 '폐제', 아버지의-이름이 자리잡지 못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에게는 상징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신병자에게는 어떤 억압도 없다. 대타자의 법인 아버지의 이름이 이름이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에, 신체에서 오는 충동을 억제할 필요가 없다. 아니 억제할 수가 없다. 프로이트에게 무의식은 억압된 것이다. 하지만 정신병자에게는 억압이 없다. '아버지의-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라캉식으로 표현해보면 정신병자에게는 상상계와 실재계만이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의식과 무의식의 구분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징계가 없다는 뜻은 4) 정신병자들에게 실재계의 충동들이 전혀 통제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병자에게는 충동이 행위로 직접적으로 표출되는 성향이 높고,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정신병자에게는 억압(법의 명령)이 존재하기 않기 때문이다.
다르게 보면, '아버지의-이름'이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 신경증자들에게 '직접적인 행동'이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라캉식으로 보면 "신경증자의 신체는 본질적으로 '죽은 신체"라고 할 수 있다. 즉, 신경증자의 신체를 기표로 뒤덮혀 있기 때문이다. 살아 생동하던 신체가 기표들에 뒤덮히면서 충동들은 억제되고 길들여진다. 이제 신체는 숨어들어가서 극소수의 영역-성감대에만 남아 있게 된다. 다시 정신병자의 증상으로 돌아가보면, 정신병자는 리비도는 억제되지 않는다. 그래서 정신병자가 경험하는 주이상스는 "몸 전체가 전기가 흐르는 듯한 느낌"과 같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황홀경이나 견디기 힘든 고통으로 다가온다.
확신하건대 신경증자들은 스스로 의문을 제시해 왔다. 이 점에 관해서 정신병자의 경우는 분명치 않다. (라캉 <세미나 3> 227쪽)
출처 입력
결론적으로 정신병자에게는 "의문"이 생기지 않는다. 이해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라캉에 따르면 욕망은 곧 질문이다. 욕망이 없다는 것은 삶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실재계적 충동만으로, 주이상의 황홀경과 고통만으로도 순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황홀경과 고통만으로 지속해서 삶을 유지하는 데에는 여러 위험이 따를 수 있다. 무기력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정신의 구조를 바꾸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금까지는 알려져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또한 동등하게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신경증자들이 다수인 세계에서 정신병은 '병'으로 '비정상적' 인가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만약 다른 사람의 정신공간이 나와 똑같다는 전제를 허물 수 있다면?
프로이트-라캉이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신경증자의 세계 역사 '환상'이라는 것이다, 또한 각각의 신경증자들은 각자의 경험과 사유를 통해사 각자 다른 환상(이야기)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신경증자가 보이에는 너무나 환상적인 세계, 너무나 비현실적이라고 여겨지는 정신병도 용납못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마지막 사례에서도 나오지만 그렇기 때문에 진단이 중요하다. 신경증인지, 정신병인지, 도착증인지에 따라서 분석의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도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신경증자에게는 '아버지의-이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도록 도와야 한다. 즉 의식 이외에 무의식의 세계,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선택하고 움직이는 지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반면에, 정신병자에게는 그 사람이 갖고 있는 환상의 세계를 조금 더 확실하게 형상화하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