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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5

죽음의 거울에 비친 생명 죽음의 거울에 비친 생명 1. 모순의 언어 혹은 모호한 태도의 루쉰 “가령 말일세, 쇠로 만든 방이 하나 있다고 하세. 창문이라곤 없고 절대 부술 수도 없어. 그 안에 수 많은 사람이 깊은 잠에 빠져 있어. 머지 않아 숨이 막혀 죽겠지. 허나 혼수상태에서 죽는 것이니 죽음의 비애 같은 건 느끼지 못할 거야. 그런데 지금 자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의식이 붙어 있는 몇몇이라도 깨운다고 하세. 그러면 이 불행한 몇몇에게 가망 없는 임종의 고통을 주는 게 되는데, 자넨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겠나?” “그래도 기왕 몇몇이라도 깨어났다면 철방을 부술 희망이 절대 없다고 할 수야 없겠지.” 그렇다. 비록 내 나름의 확신은 있었지만, 희망을 말하는데야 차마 그걸 말살할 수는 없었다. 희망은 미래 소관이고 절대 없다는.. 2017. 9. 29.
불쾌감이라는 화폐 불쾌감이라는 화폐 아버지의 노동을 볼 수 없는 세대가 되었다. 어릴 적부터 앞마당을 쓸거나, 밥 먹을 때 수저를 챙기고, 청소를 하면서 가정에서 자신이 나름의 역할을 한다고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 가정이나 마을에서 활동과 노동으로 사회적/가정적/공동체적 역할을 경험할 기회가 없어져 버렸다. 그런 모습을 볼 수도 없다. 예전엔 월급봉투라도 볼 수 있었고, 월급날엔 아버지가 사온 통닭을 먹으면서 그 감각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버지가 노동으로 돈을 벌어온다는 감각은 가장이 집에 들어오면서 드러내는 불쾌감의 양으로 판단된다. 집에서는 아버지의 불쾌감으로 그가 뭔가 바깥에서 힘든 노동을 했다는 감각을 갖게 된다.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다. 집안의 가사 노동으로 자신 역시 얼마나 힘든지를 .. 2017. 9. 27.
덕德으로서의 건강 두 개의 분수령과 덕德으로서의 건강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는 격언은 소크라테스의 말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 말은 델포이 신전에 쓰여져 있던 경구 중 하나다. 델포이 신전은 가파른 산등성이 위에 세워져 있는데 이곳을 오르다 보면 절로 신에 대한 외경이 느껴지는 곳이다. 고대에 수많은 그리스인들은 델포이 신전에 들려 개인적으로 혹은 공동체적으로 맞닥트린 위기에서 답을 얻었을 것. 그런데 델포이 신전에는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 이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경구가 쓰여져 있다. “Meden agan”. 이 말은 어떤 일에서도 ‘도를 넘지 말라’ 혹은 ‘지나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합리와 이성으로 유명한 아테네인들조차도 ‘오만한hybris 행동’은 결국 파멸miasma을 가져온다는 .. 2017. 9. 27.
조르바와 자유 조르바와 자유- 심연의 문을 두려워하지 말자 “그래요 당신은 나를 그 잘난 머리로 이해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이건 진실이고 저건 아니다, 그 사람은 옳고 딴 놈은 틀렸다…….’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당신 팔과 가슴을 봅니다. 팔과 가슴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침묵한다 이겁니다. 한 마디도 하지 않아요. 흡사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것 같다 이겁니다. 그래, 무엇으로 이해한다는 건가요? 머리로? 웃기지 맙시다!” p322 그때 내 뒤로 행복에 겨운 목소리가 들렸다. 조르바가 일어나 반라의 몸으로 문께로 나선 것이었다. 그 역시 봄 풍경에 화들짝 놀란 것이었다. “저게 무엇이오?” “……두목, 저기 저 건너 가.. 2017. 9. 20.
이반 일리치를 소개합니다 이반 일리치를 소개합니다 중심으로 ‘사람은 좋지만 스타일style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은 모순적이다. 한 사람의 스타일이란 바로 그 사람 자체이기 때문이다. 책도 마찬가지다. 내용은 마음에 들지만 문체가 문제라는 것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문체란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저자의 숙고된 방식이고, 문체 자체가 바로 그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의 한 면을 드러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는 특히 각주가 많고 꼼꼼~한 주석들이 붙어 있다. ^^; 하지만 이런 “주註는 이 책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일리치는 전문가의 권위에 의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학자들이 지금까지 책의 쪽 밑 모든 작은 활자에 대하여 행사하여온 독점을 타파”하기 위해서 이런 방식의 글쓰기를 시도했다. 지식인도 아닌 혁명가도 아닌 일리치는 19.. 2017. 9. 19.